WRC 랠리카에 숨겨진 비밀들

드라이버의 안전을 보장하다

WRC 랠리카에

숨겨진 비밀들

by HMG

 

모두가 입을 다물 수 없는 아찔한 사고. 

하지만 운전대를 잡은 드라이버는 아랑곳 않고 시트에서 몸을 털며 차량에서 빠져나온다. 

WRC 랠리카의 철저한 안전 구조 덕분이다.


지난 1월, WRC 2020 시즌 대장정의 막이 올랐다. 

올해의 첫 무대도 어김없이 몬테카를로였다. 

치열했던 개막전에선 수 년째 현대월드랠리팀의 에이스로 활약해온 티에리 누빌 선수가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2019 시즌에 이어 2년 연속으로 제조사 챔피언을 목표로 하는 현대월드랠리팀에게 청신호가 켜진 것이다.


오트 타낙 선수는 WRC 2020 개막전에서 차체가 크게 파손되는 사고를 당했다. 

하지만 특별한 부상은 입지 않았다 하지만 티에리 누빌 선수의 우승 소식 이외에도 모터스포츠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순간이 있었다. 

현대월드랠리팀 유니폼을 입고 처음 경기에 참가한 오트 타낙 선수가 SS4 구간 주행 중 대형사고를 당한 것이다. 

오트 타낙 선수의 i20 쿠페 WRC 랠리카(8번)는 시속 180km에 달하는 빠른 속도에서 접지력을 잃고 비탈길로 추락했다. 


추락과 함께 수 바퀴를 구른 랠리카는 심각한 파손을 입었고, 그 광경을 지켜본 팬들은 마음을 졸여야 했다. 

그러나 걱정도 잠시, 오트 타낙 선수는 완주에 실패했다는 아쉬운 표정으로 별다른 상처 없이 랠리카에서 빠져나왔다. 

꼼꼼히 짜여진 WRC 랠리카의 안전 구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i20 쿠페 WRC 랠리카를 비롯한 모든 WRC 경주차는 FIA의 안전 규정에 맞춰 제작된다


WRC를 주관하는 FIA(국제자동차연맹)는 경주차 제작에 치밀한 안전 규정을 제시하고 있다. 

롤 바(Roll-bar) 제작에 사용되는 파이프의 재질이나 직경은 물론, 볼트 및 너트의 간격과 크기까지 일정한 규격을 지정하고 있다. 

롤 바는 경주차 실내에 장착되는 구조물로 차체 강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전복 및 충돌 사고에서 탑승자의 안전을 지켜준다. 


참고로 현대월드랠리팀은 옆 창문을 초고속 열차나 항공기에 쓰이는 고가의 폴리카보네이트로 제작하는 등 부품 내구성 향상과 더불어 드라이버의 안전 확보에도 힘쓰고 있다.

현대월드랠리팀은 WRC에 10여 년 만에 복귀한 이후, 6번의 시즌을 치르면서 드라이버들의 별다른 부상 소식이 없었을 정도로 FIA의 안전 규정을 충실히 지켜오고 있다. 

각 제조사들은 성능 향상과 함께 탑승자의 완벽한 안전을 목표로 랠리카를 제작한다


WRC 랠리카는 레이스에서 승리를 거머쥐기 위한 경주차다. 

차체가 무거우면 가속과 코너링 성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베이스가 되는 양산차에서 안전과 성능에 관련된 것 이외의 요소들은 모두 제거한다. 

이런 이유로 랠리카는 내부에 주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전자장비만을 갖춘다. 

그리고 이외의 공간에는 드라이버와 코-드라이버의 안전을 위한 장비들이 채워진다. 

주행 상황에서 드라이버를 든든히 지탱하는 버킷 시트와 드라이버가 차량을 탈출할 때 스티어링 휠을 신속하게 분해할 수 있게 돕는 퀵 릴리스 기어, 혹시 모를 화재에 대응하기 위한 소화기 등이 대표적이다. 




롤 바는 랠리카의 차체 강성을 높여줄 뿐 아니라, 충돌 및 전복 사고 시 탑승자를 보호하는 역할도 겸한다


롤 바(롤 케이지라고도 부른다)는 사고로부터 드라이버를 보호하는 가장 중요한 안전 장비 중 하나다. 

루프와 도어는 물론, 거의 모든 내부 공간을 거미줄처럼 엮어 차체 강성을 대폭 개선한다. 

오트 타낙 선수의 경주차가 크게 파손되는 와중에도 승객 공간만은 멀쩡히 그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FIA는 롤 바 제작에 대해 매우 상세한 규정을 제시하고 있다. 

가령 롤 바 자재는 지름 45mm/두께 2.5mm 또는 지름 50mm/ 두께 2mm의 탄소 함유량 0.3% 이하인 냉간 인발 탄소강(Cold Drawing Carbon Steel)을 사용해야 한다. 

롤 바의 안전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롤 바는 WRC 랠리카 안전 구조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FIA는 롤 바 규정에서 ‘롤 바는 승하차에 방해가 되어선 안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위급 상황에서 탑승자의 탈출 용이성도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제조사들은 이 조항에 따라 드라이버와 코-드라이버가 원활하게 타고 내릴 수 있게 문 쪽에 장착되는 ‘도어 바’를 도어 구조물보다 낮게 배치하고 있다.




버킷 시트는 드라이버 체형에 정확하게 맞춰 제작된다.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안전에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WRC 랠리카에서 롤 바만큼 중요한 안전 장치가 바로 버킷 시트다. 

버킷 시트는 코너 주행 시 횡 중력에 드라이버의 몸을 받쳐주는 역할을 한다. 

머리와 어깨, 골반 부위에 날개 모양의 지지대(Plane)가 있어 신체의 움직임을 확실하게 억제한다. 

제조사는 시트를 각 드라이버의 체형에 최적화하기 위해 특수 소재를 이용한 맞춤형 시트를 제작한다. 


랠리에서는 노면의 고저차로 인해 차체가 도약하거나 나무와 같은 자연 지형에 충돌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FIA는 이때 차체로 전해지는 진동과 충격이 드라이버에게 직접 전달되지 않게끔 일종의 완충재인 에너지 업소버(Energy Absorber)의 장착을 명시하고 있다. 

에너지 업소버는 시트 방석과 헤드레스트, 어깨 지지대 등에 삽입돼 충격으로 인한 부상을 방지한다. 

운전석에는 드라이버를 지키기 위한 철저한 대책이 숨겨져 있다


아울러 드라이버는 경추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한스(HANS, Head And Neck Support Device)라는 안전 장비를 착용해야 한다. 

목베개처럼 생긴 한스는 CFRP(탄소 섬유 강화 플라스틱)로 만들어져 가볍고 단단하며, 드라이버의 머리를 고정해 충돌 사고가 났을 때 두개골 골절과 더불어 경추 골절, 즉 목뼈가 부러지는 현상을 방지한다. 




한편, 랠리카의 안전벨트는 승용차에 쓰이는 것과는 구성부터 모양새까지 판이하다. 

경주용 안전벨트는 하네스(Harness)라고 불리며, WRC 랠리카의 강력한 성능에 대응하기 위해 탑승자의 몸을 단단하게 고정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WRC에서 사용하는 6점식 하네스는 차체 곳곳에 고정돼 강한 충격이 발생하더라도 드라이버의 몸이 전방으로 튀어나가지 않게 만든다. 

FIA는 WRC 랠리카를 이루는 거의 모든 부품을 내화재로 구성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랠리카는 차량 훼손은 물론, 드라이버의 생명까지 앗아갈 수 있는 화재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다. 

FIA는 화재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엔진에 장착되는 부품과 탑승 공간 내에 있는 모든 요소들을 불에 타지 않는 소재로 제작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부품 표면은 미국 난연 평가 기준 ‘UL94’의 V-0 수준을 만족시켜야 한다. 


아울러 연료를 비롯한 오일류를 담고 있는 탱크가 화재로 폭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탱크를 내화재로 제작하는 것과 누출 방지 장치 및 방염 커버 장착도 권고하고 있다. 

게다가 드라이버는 수트 안쪽에 방염 내의를 착용하고, 운전석에는 내화제 3kg 이상을 담고 있는 소화기를 비치하도록 규정해 화재 발생으로 인한 2차 피해도 원천봉쇄하고 있다. 

*UL94 V-0 : 불이 붙었을 때 10초 이내에 연소가 멈추는 수준을 의미


랠리카의 안전 장비는 신속한 탈출 상황까지 치밀하게 고려해 설계된다


물론 이런 철두철미한 안전 체계 속에서도 화재나 폭발 사고는 발생할 수 있다. 

때문에 드라이버는 빠른 시간 내에 경주차에서 탈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드라이버는 커다란 버킷 시트와 스티어링 휠에 갇혀 있는 데다, 하네스에 묶여 있어 차량에서 빠르게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하네스와 스티어링 휠에는 이런 상황을 대비한 안전장치가 장착된다. 

바로 퀵 릴리스(Quick Release)다. 

퀵 릴리스는 이름 그대로 신속한 탈착을 위한 장치로, 하네스는 벨트를 연결하는 버클의 레버 또는 버튼을 조작하면 손쉽게 분해되며, 스티어링 휠은 컬럼 사이의 레버 조작으로 탈거가 가능하다. 


WRC 드라이버들의 과감한 주행은 랠리카의 안전성이 뒷받침 되기에 가능한 것이다


코스를 빠르게 질주하는 WRC 랠리카들은 언뜻 성능에만 치중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안전 기술의 집약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조사들이 드라이버들의 안전을 위해 랠리카의 안전성을 끊임없이 강화해 온 덕분이다. 물론, 드라이버들이 WRC에서 과감하고 역동적인 드라이빙을 선보일 수 있는 것도 랠리카의 이런 안전성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