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 돌 때마다 재평가 받는 영화 <감기>

전염병 돌 때마다 재평가 받는 영화 

<감기>



감염속도 초당 네 명, 치사율 100% 슈퍼 바이러스가 온다

by 제로


“인류가 지구를 영속적으로 지배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위협은 바이러스다(The single biggest threat to man's continued dominance on the planet is the virus).” 

195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조슈아 레더버그가 한 말이다. 

흔히 인간을 적응의 동물이라 부른다. 새로운 환경에서 곧잘 생존하고 해법을 찾아내는 근성과 지혜가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 

그 결과 이제 지구상에 인류를 위협할만한 것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다르다. 

바이러스는 변화무쌍한 존재다. 

일개 세포보다도 작고 단순한 구조라 복제 주기가 극도로 짧고 그만큼 돌연변이도 잦다. 

뛰어난 적응력을 무기삼아 번창해온 인류조차 따라잡기 버거울 정도다.


최근 전세계가 바이러스의 맹습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다. 

지난해 말 중국 우한에서 첫 발견된 코로나-19는 불과 몇 개월만에 전세계로 퍼져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당장 중국과 이웃한 우리나라는 벌써 수천 명이 감염되고 사망자까지 나올 지경이다. 

바이러스를 둘러싼 혼란이 들불처럼 번지는 가운데 전국 학교는 개강 연기, 기업은 재택 근무를 통해 사람들의 외출을 자제시켰다. 

이런 시기에는 괜히 나가서 타인과 접촉하지 말고 집돌이, 집순이가 되어 크레이지 자이언트를 읽거나 영화라도 감상하길 추천한다. 

마침 여기 전염병 사태에 대한 경각심을 되새기기 좋은 작품이 하나 있다. 

바로 김성수 감독의 2013년작 <감기, The Flu>다.


사상 초유의 사태, 전염병에 휩쓸린 분당


2014년 4월, 홍콩발 무역선을 통해 컨테이너 하나가 평택항으로 옮겨진다. 

일견 평범한 화물처럼 보이는 컨테이너는 사실 십여 명의 밀입국자를 한국에 들여오기 위한 위장막. 

문제는 밀입국자 중 일부가 조류 인플루엔자 감염자였고, 비위생적이며 폐쇄된 컨테이너는 바이러스가 창궐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일종의 천연 배양실이 된 컨테이너 안에서 조류 인플루엔자는 급격한 돌연변이를 일으켜 치사율 100%에 달하는 슈퍼 바이러스가 되어버렸다. 

이런 사정은 전혀 몰랐던 국내측 밀입국자 운반책은 컨테이너 속 시체 무더기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그나마 아직 숨이 붙어있는 필리핀 청년 하나를 챙겨서 서둘러 자리를 뜬다.


영화 전반부는 마치 감염 예방 교육을 위한 시청각 자료처럼 등장인물의 잘못된 행동과 그로인한 바이러스 전파를 자세히 조명한다. 

처음 컨테이너를 연 운반책은 동업자인 친형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마스크를 쓰지 않아 슈퍼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이후 가벼운 감기인줄 알고 약국에 갔다가 입도 가리지 않고 재채기를 하여 더 많은 감염자를 양산한다. 

그와 대면한 약사는 물론 여학생과 어린아이, 그 부모 등 현장에 있던 모두가 자신도 모르게 슈퍼 바이러스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이들이 다시 대중교통을 타고 직장과 학교, 유치원을 오가면서 마침내 인구 46만의 분당 전체가 전염병에 휩쓸리는 사상 초유의 재난으로 발전하고 만다.


한편, 문제의 바이러스가 조류 인플루엔자 변종임을 처음 진단한 의사 수애는 어린 딸 민하를 데리러 도심으로 향한다. 

정부가 서울을 보호하려 분당 봉쇄라는 초강경책을 내놓자 사람들은 패닉에 빠져 마트로 몰려들고, 이 와중에 민하가 위기에 빠지지만 다행히 119 구조대원 장혁이 구해낸다. 

이제 봉쇄된 분당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수애와 민하 그리고 장혁.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쯤에서 구호가 이루어졌겠지만 CDC(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의 압박을 받는 정부는 되려 군대를 동원하여 시민들을 열악한 수용시설로 몰아넣는다. 

여기저기서 빗발치는 항의와 군대의 반인권적 진압이 엇갈리는 가운데 전염병 사태는 악화일로를 걷는다.


설마 저러는 사람이 있겠어? 근데 있더라


이런 재난 영화가 대체로 그렇듯 <감기>는 전염병이 돌았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온갖 악재의 종합선물세트다. 

무능한 정부의 졸속 대응, 군대에 의한 통제와 폭력, 이기심에 빠져 그걸 지지하는 타지역 사람들, 공포에 질려 혼란을 가중시키는 희생자들, 그 틈을 노려 사익을 챙기는 악한들까지. 

심지어 다른 인간군상과 대비되어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줘야할 장혁과 수애조차 시종일관 무리수와 삽질을 반복한다. 

아무리 슈퍼 바이러스로 인한 비상 사태라지만 CDC가 한국 대통령을 무시하고 과격한 방역에 나선다든가 군인이 시민을 패는 장면은 지나친 비약이기도 하다. 

냉정히 말해서 보다 보면 짜증나는 영화인지라 개봉 당시 흥행은 별로였다.


영화 자체로 평가할 때 <감기>는 잘 봐줘야 평작 수준이다. 

그럼에도 2015년 메르스 유행 때나 금번 코로나-19 확산 사태에 맞춰 재평가를 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현실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으니까. 

솔직히 필자가 극장에서 <감기>를 봤을 때 이게 무슨 총체적 난국인가 싶었다. 

등장인물은 모조리 천치인지 전염병 사태에 해선 안 될 짓만 골라서 하고 작은 불운이 겹치고 겹쳐 문제가 눈덩이마냥 불어난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즘 뉴스를 보면 이런 부류가 정말로 존재한다. 

확진 판정을 받았음에도 마스크 산다며 대형마트에 가질 않나, 자신의 동선을 숨겨 감염원 파악을 어렵게 만들고 아예 일부러 불특정다수를 감염시키려는 자도 있다.


결국 타인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이 사라짐에 따라 ‘말도 안되는’ 영화가 ‘말이 될 법도 한’ 영화로 탈바꿈한 셈이다. 

필자는 이 원고를 위해 최근 <감기>를 다시 봤다. 

영화야 여전히 구렸지만 더는 등장인물들의 실수와 오판이 남일 같지가 않더라. 

최소한 이 영화에는 사이비는 안 나온다. 

정작 우리는 사이비 종교 때문에 코로나-19 확진자가 수천 명씩 늘어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밀입국자로 인한 최초 감염도 우한 폐렴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보다 극심한, 마치 <감기>에서와 같은 판데믹이 터졌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영화를 보며 손가락질했던 천치 노릇을 내가 하진 않을까. 한번쯤 생각해볼 지점이다.


영화는 영화지만, 마스크는 꼭 착용하자

그러면 영화 이야기를 마무리 짓자. 

사실 후반부야말로 <감기>의 평가가 깎인 주된 원인이다. 

전반부가 그래도 멀쩡한 재난 영화의 틀을 갖췄다면 여기서부턴 완전히 막 나간다. 

군 간부였던 마동석은 자신조차 감염되었음을 확인하자 사람들을 선동, 수용시설을 무너뜨린 후 서울로 향한다. 

이에 한국 정부가 방역에 실패했다고 판단한 CDC는 미군 전투기를 띄워 분당을 폭격하려 하고, 대통령 차인표는 그걸 수방사 지대공 미사일로 격추하겠다며 맞선다. 

당초 항체 보유자로 알려진 필리핀 청년이 폭도에게 칼을 맞아 사망한 가운데 미리 그 항체를 투여 받은 민하가 유일한 희망으로 떠오른다. 

장혁과 수애는 저마다 민하를 지키려 사력을 다한다.


물론 영화와 달리 주한미군은 한국 대통령 동의 없이 수도권 한복판을 폭격할 수 없다. 

전시작전통제권이란 어디까지나 ‘전시’에만 유효하며 그나마도 대통령의 개입을 배제하진 않는다. 

그리고 치사율 100%에 슈퍼 바이러스면 오히려 감염자가 너무 빨리 죽어서 이만큼 확산이 될 수 없다. 

치사율이 그리 높지 않은 코로나-19가 전파에 있어선 더 유리한 조건이다. 

이외에도 지적할 게 산더미지만 상술했듯 요즘이야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긴 하니까. 

그냥 악재가 엄청나게 꼬이면 저렇게도 막장 터지는구나, 정도로 받아들이자. 

다행히 우리는 <감기> 속 사람들보다 이 사태를 훨씬 잘 견뎌내고 있으니까. 

모쪼록 마스크는 잘 쓰고 다니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