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APPY
CHRISTMAS
크리스마스는 온누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날이다.
확실히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
하지만 누군가의 탄생을 이끌어내면 엄마에게 등짝 스매싱을 맞고 평생 한숨 쉬게 될 수도 있다.
맘껏 즐겨라. 하지만 뒤처리는 깔끔하게!
by 이영진 model 채하

핏빛 로맨스
간단 자기소개
직업 회사원
나이 30
성별 남
시기 10년 전, 크리스마스이브
저는 대학에 붙으면서 서울로 유학 온 자취생이었습니다.
자취생들은 원래 잘 뭉치는 습성이 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나이나 학년을 뛰어넘어 잦은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자연스레 자취생집단이 형성되면서 같은 학년 친구들과는 어울리기가 쉽지 않게 됩니다.
남학생끼리는 농구나 게임을 하면서 잘 놀아요.
하지만 여학생들과는 접점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동기 남학생은 동기 여자애들과 스스럼없이 잘 지내는데, 저는 그게 쉽지 않은 겁니다.
복학생들과 족구를 하러 돌아다니고, 선배들과 술을 마시러 떠도는 제 모습을 보면서 여자애들은 저를 지레짐작 규정해버렸습니다.
여자에 관심 없고 오로지 남자들끼리 어울리는 것만 좋아하는 놈팽이로 말이죠.
전 억울했습니다. 하지만 지나가는 동기를 잡고 오해를 풀 수 있을까요?
“희진아, 나는 사실 여자 좋아해.” “인혜야, 여자랑 부비부비하면서 놀고 싶어.” “민지야, 데이트라는 걸 해보고 싶다!”
더 미친놈처럼 보이겠죠?
저는 자포자기하고 점점 더 깊은 금녀의 결계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날도 두 명의 선배와 자취방에서 술을 마셨습니다.
술자리 성별도 여전했지요. 남자, 남자, 남자. 계속 술을 마시는데 틀어놓은 인터넷 라디오에선 캐롤과 사랑 노래가 번갈아 나옵니다.
남자 셋은 점점 더 우울해졌습니다.
선배 한 명의 눈빛이 갑자기 초롱초롱해졌습니다.
“애들을 부르자!” 밤 10시 가까운 시간에, 그것도 크리스마스이브에 뭔 소리인가 했지만 선배 둘은 1학년인 제 동기 여자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구라를 풀었습니다.
“시간 되는 선후배들이 다 같이 모여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기로 했어. 너도 괜찮으면 학교 쪽으로 오지 그래?”
당연히 대부분의 여자 동기들은 죄송하다며 거절했습니다.
미리 약속을 해둬도 어려울텐데 크리스마스이브 당일 밤 10시에 통할 리가 없지요!
그런데 수원에 사는 동기 한 명이 알았다며 학교로 오겠다고 했습니다.
전 깜짝 놀랐습니다.
수수하면서 예쁜 친구라 내심 좋아했거든요.
그런 그녀를 크리스마스이브에 만나게 될 것이라니!
아무튼 수십 통의 전화 도전 끝에 한 건의 성공에 심취한 선배들은 지금까지의 두 배 속도로 축하주를 마셔댔습니다.
밤 11시를 넘어가면서 그들은 술과 합체해서 술떡으로 변신했습니다.
선배 한 명이 벌떡 일어나더니 소리를 지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이렇게 보낼 수 없어! 뭔가 기억에 남는 일을 해야겠어!”
다른 선배는 비틀거리며 면도칼을 가져왔습니다.
“우리, 혈서를 쓰자! 기억에 남게 혈서를 쓰자!” 선배 둘은 손가락을 긋고 벽에 피칠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정이 되기 십여 분 전, 그녀가 도착했습니다.
십여 명의 선배와 동기가 모여 있다는 자취방에는 단 세 명의 남자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둘은 인사불성이 되어 사방에 피를 흩뿌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얼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차가 끊겨서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과했습니다.
말리려고 했지만 이렇게 되어버렸다고, 너무 미안하다는 제 말에 그녀는 저를 껴안고 펑펑 울기 시작했습니다.
충분히 울 때까지 기다린 후 저는 그녀와 함께 선배의 자취방을 나왔습니다.
제 자취방으로 안내한 후 여기에서 자고 가라고 했습니다.
저는 핏빛 자취방으로 돌아가겠다고 했고요.
그녀는 가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날 살색 로맨스가 만들어지진 않았습니다.
알퐁스 도데의 <별>처럼 우린 밤새 대화만 나눴습니다.
하지만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사귀게 되었습니다.
새해에는 그녀와 첫 경험을 하기도 했고요.
크리스마스이브, 혈흔 낭자한 공간에서 사랑이 싹텄다니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 글의 교훈!
최선의 조건에서 최고의 결과가 나올 수는 있다.
하지만 환경만 탓해선 결과를 내기 어렵다. 피로 범벅이 된 방에서도 사랑의 씨앗은 싹틀 수 있다.
사람의 뇌는 위기 상황이 되면 주변에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는지 찾게 된다.
힘들 때 짜증을 내거나 나 몰라라 해서는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힘들 때 웃는 게 프로고, 힘들 때 작업에 들어가는 게 선수다.

꿩 대신 행복한 닭
간단 자기소개
직업 대학생
나이 24
성별 남
시기 작년 크리스마스
지난해 가을에 제대하고 복학을 준비하며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크리스마스에도 딱히 만날 사람이 없어서 평소처럼 심야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새벽 1시쯤 되었을까요?
편의점에 되게 예쁜 누나가 들어와서 담배를 샀습니다.
너무 예뻐서 계산하고 나가는 그녀를 따라 편의점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편의점 문 앞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들고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봤습니다.
예쁜 누나는 길 건너 포장마차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애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자의 옆자리에 딱 달라붙어 앉았습니다.
역시 크리스마스에 예쁜 여자가 혼자 있을 턱이 없지.
크리스마스는 차라리 없어져버려라! 솔로천국 커플지옥! 중얼거리며 담배 연기를 들이마셨습니다.
그래도 포장마차 쪽으로 자꾸 눈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포장마차에는 온통 커플들뿐이었습니다.
그녀 커플도 화기애애하게 술잔을 기울입니다.
씁쓸했지만 예쁜 여자를 보면 기분이 좋지요.
일하다가도 잠깐씩 나와서 저 멀리 그녀를 바라봤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쯤 지났을까요? 커플이 말다툼하는 게 보였습니다.
이유는 몰라도 움직임도 커졌습니다. 남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포장마차를 나섰습니다.
여자는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술잔을 들이켰습니다.
저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습니다.
너무 안되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지요.
갑자기 춥다는 게 느껴졌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서있던 겁니다.
편의점으로 돌아가려는데 그녀가 고개를 들더니 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뭘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깜짝 놀랐습니다.
그녀의 손가락이 까딱까딱 저를 불러댔습니다.
두리번거렸지만 주변엔 저밖에 없었습니다. 쭈뼛쭈뼛 길을 건너 포장마차로 들어갔습니다.
그녀는 다짜고짜 제게 소주잔을 건네더니 반말로 마시라고 했습니다.
포스에 눌렸던 걸까요? 전 ‘네...’ 대답하고 술을 마셨습니다.
그녀 앞에 앉으니 편의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손님이 들어오진 않을지 불안해하며 지켜봤습니다.
그녀가 화장실에 가자마자 저는 뛰어가서 편의점 문을 잠그고 나왔습니다. 옷도 갈아입었고요.
돌아온 그녀는 술값을 계산하더니 한잔 더 하자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네..’ 대답했습니다. 그녀가 저를 데려간 곳은 근처의 디자인호텔이었습니다.
술은 더 마시지 않았습니다.
남자친구와 크리스마스를 보내려고 잡아놓은 방이었나 봐요.
저는 그녀와 뜨거운 밤을 보냈습니다.
일이 끝난 후 그녀를 포옹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저를 밀쳐내며 가라더군요.
이번에도 저는 ‘네..’하고 옷을 주섬주섬 들고 호텔 방을 나섰습니다.
저는 누나의 이름도 모릅니다.
심지어 어쩌면 누나가 아닐지도 모르죠.
연락처를 따고 만남을 지속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포스는... 감히 그런 희망을 품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도 무슨 상관인가요?
그날 밤은 제 24년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순간이었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를 속으로 되뇌게 만들 정도로 말이죠.
이 글의 교훈!
아무튼 그녀에겐 애인이 있었다.
글쓴이가 특별히 뭔가를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애인 있는 여자를 정신 잃고 계속 바라보는 인간은 많지 않다.
간절함이 기적을 만든다.
얼마나 뚫어지게 쳐다봤으면 이런 기적이 일어나겠나?
너무 많은 남자들이 지레 포기해버린다.
용기 있는 자만이 미녀를 얻는다.

패자부활전
간단 자기소개
직업 취업준비생
나이 26
성별 남
시기 작년 12월 27일
올해는 직장인으로 변신할 줄 알았는데 코로나 때문에 한 해 더 집콕하게 된 26세 청년입니다.
지난 연말 취업에 실패하고 의기소침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이었죠.
당시 제 다크 포스는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6개월쯤 썸 타던 여인까지 제 어둠이 숨 막힌다며 떠나버렸을 정도였습니다.
썸녀와의 이별은 제 자존감을 무간지옥으로 떨어뜨렸습니다.
지옥을 배회하던 12월 27일,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던 여사친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술이나 한잔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었죠.
크리스마스까지 갓 지난 터라 우울증은 최대치로 치솟아 있었습니다.
세상은 내 주위만 빼고 반짝반짝 빛나는 듯했습니다.
그런 세상에 나가기 싫었습니다.
다음에 보자며 전화를 끊으려 했는데, 그녀는 오늘 반드시 술을 마셔야겠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저 못지않게 어두웠습니다.
유유상종이라고 다크한 인간들 사이엔 인력이 작용하는 걸까요?
저는 결국 그녀의 동네로 찾아갔습니다.
그녀도 저처럼 시커먼 롱패딩을 입고 있더군요.
우리는 돼지껍데기 집에 들어갔습니다.
조금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저를 불러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녀는 대답 없이 소주만 두세 잔을 들이켰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녀가 닭똥 같은 눈물을 돼지껍데기 위로 뚝뚝 떨어트렸습니다.
남자친구와 헤어졌답니다.
저와 다를 바 없는 어둠의 다크녀에게 남친이 있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습니다.
그런데 헤어진 이유를 들어보니, 제 썸녀와의 이별과 다를 바가 없더군요.
어둠이 빛을 몰아낸 것이었습니다.
저는 웃음이 터졌고, 그녀는 저를 매섭게 노려봤습니다.
돼지껍데기라도 던질 기세였습니다.
저는 비웃는 게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취업에 실패할 줄 몰랐고, 썸녀에게 차일 줄도 몰랐다고.
나처럼 우중충한 사람이 바로 앞에 있다니 기분이 이상해서 웃었다고.
이야기를 듣고 난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태로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렸습니다.
“병신.” “병신은 무슨. 똑같은 처지에.”
앞으로 잘 될 거라는 식의 뻔한 소리는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와 모처럼 공감대를 형성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얼마나 엿 같은지 가벼운 욕지거리를 주고받으며 술을 마셨습니다.
저는 사라진 아침이 거지같다고 했습니다.
백수에게 아침 햇살은 견디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정오 가까운 시간의 기상이 유쾌하진 않았습니다.
너무 밝은 시간에 눈을 뜨면 스스로가 무척 혐오스럽거든요.
그녀도 동감이라고 했습니다.
일찍 일어나기도 싫고, 늦게 일어나는 것도 싫으니 어쩔 줄 모르겠답니다.
그러면서 자기에게도 언젠가 브런치 있는 삶이 찾아올지 궁금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저는 “브런치 따위 뭐 대단하다고!” 라고 질러버렸고, 어쩌다보니 다음날 같이 브런치를 먹자는 쪽으로 분위기가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오바이트 하도록 술을 진탕 마신 백수와 백조가, 다음날 브런치를 위해 일찍 일어나는 게 말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브런치를 먹으러 가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자정도 되기 전에 돼지껍데기 집은 문을 닫았습니다.
우리는 모텔에서 술을 마시며 아침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모텔에 들어가자마자 우리는 계획과 달리 옷을 벗었고, 밤새도록 몸을 섞어댔습니다.
거의 아침이 다 되어서야 잠이 들었고, 두어 시간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몸도 마음도 더 없이 개운했습니다.
그녀도 뭔가 털어낸 것처럼 가뿐하다고 했습니다.
브런치는 개뿔. 우리는 뼈다귀해장국을 한 그릇씩 때리고 헤어졌습니다.
우리는 몇 번 더 만났고, 한두 번은 관계를 가졌지만 사귀게 되진 않았습니다.
올 가을에 그녀가 지방의 친척 회사에 취업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졌습니다.
그녀와의 섹스가 아주 짜릿했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가 경험했던 모든 섹스에서 뒤끝이 가장 상쾌했습니다.
지난 해 그녀와 보낸 밤을 가장 행복한 크리스마스라고 하진 못하겠습니다.
지금도 취업을 고민하고 있고, 여자친구도 없는 백수가 행복을 운운하는 것도 웃기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날 이후 제 마음에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내년에는 취업에 성공할 것이란 근거 없는 자신감도 있습니다.
행복까진 몰라도 기억에 남는 연말이었던 건 분명하겠죠?
이글의 교훈!
좋았겠다! 주변에 여사친을 많이 만들어둬야 한다.


다른 분들도 더 있다구요 !!

#2020년 12월호 #채하
HAPPY
CHRISTMAS
크리스마스는 온누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날이다.
확실히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
하지만 누군가의 탄생을 이끌어내면 엄마에게 등짝 스매싱을 맞고 평생 한숨 쉬게 될 수도 있다.
맘껏 즐겨라. 하지만 뒤처리는 깔끔하게!
by 이영진 model 채하
간단 자기소개
직업 회사원
나이 30
성별 남
시기 10년 전, 크리스마스이브
저는 대학에 붙으면서 서울로 유학 온 자취생이었습니다.
자취생들은 원래 잘 뭉치는 습성이 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나이나 학년을 뛰어넘어 잦은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자연스레 자취생집단이 형성되면서 같은 학년 친구들과는 어울리기가 쉽지 않게 됩니다.
남학생끼리는 농구나 게임을 하면서 잘 놀아요.
하지만 여학생들과는 접점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동기 남학생은 동기 여자애들과 스스럼없이 잘 지내는데, 저는 그게 쉽지 않은 겁니다.
복학생들과 족구를 하러 돌아다니고, 선배들과 술을 마시러 떠도는 제 모습을 보면서 여자애들은 저를 지레짐작 규정해버렸습니다.
여자에 관심 없고 오로지 남자들끼리 어울리는 것만 좋아하는 놈팽이로 말이죠.
전 억울했습니다. 하지만 지나가는 동기를 잡고 오해를 풀 수 있을까요?
“희진아, 나는 사실 여자 좋아해.” “인혜야, 여자랑 부비부비하면서 놀고 싶어.” “민지야, 데이트라는 걸 해보고 싶다!”
더 미친놈처럼 보이겠죠?
저는 자포자기하고 점점 더 깊은 금녀의 결계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날도 두 명의 선배와 자취방에서 술을 마셨습니다.
술자리 성별도 여전했지요. 남자, 남자, 남자. 계속 술을 마시는데 틀어놓은 인터넷 라디오에선 캐롤과 사랑 노래가 번갈아 나옵니다.
남자 셋은 점점 더 우울해졌습니다.
선배 한 명의 눈빛이 갑자기 초롱초롱해졌습니다.
“애들을 부르자!” 밤 10시 가까운 시간에, 그것도 크리스마스이브에 뭔 소리인가 했지만 선배 둘은 1학년인 제 동기 여자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구라를 풀었습니다.
“시간 되는 선후배들이 다 같이 모여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기로 했어. 너도 괜찮으면 학교 쪽으로 오지 그래?”
당연히 대부분의 여자 동기들은 죄송하다며 거절했습니다.
미리 약속을 해둬도 어려울텐데 크리스마스이브 당일 밤 10시에 통할 리가 없지요!
그런데 수원에 사는 동기 한 명이 알았다며 학교로 오겠다고 했습니다.
전 깜짝 놀랐습니다.
수수하면서 예쁜 친구라 내심 좋아했거든요.
그런 그녀를 크리스마스이브에 만나게 될 것이라니!
아무튼 수십 통의 전화 도전 끝에 한 건의 성공에 심취한 선배들은 지금까지의 두 배 속도로 축하주를 마셔댔습니다.
밤 11시를 넘어가면서 그들은 술과 합체해서 술떡으로 변신했습니다.
선배 한 명이 벌떡 일어나더니 소리를 지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이렇게 보낼 수 없어! 뭔가 기억에 남는 일을 해야겠어!”
다른 선배는 비틀거리며 면도칼을 가져왔습니다.
“우리, 혈서를 쓰자! 기억에 남게 혈서를 쓰자!” 선배 둘은 손가락을 긋고 벽에 피칠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정이 되기 십여 분 전, 그녀가 도착했습니다.
십여 명의 선배와 동기가 모여 있다는 자취방에는 단 세 명의 남자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둘은 인사불성이 되어 사방에 피를 흩뿌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얼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차가 끊겨서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과했습니다.
말리려고 했지만 이렇게 되어버렸다고, 너무 미안하다는 제 말에 그녀는 저를 껴안고 펑펑 울기 시작했습니다.
충분히 울 때까지 기다린 후 저는 그녀와 함께 선배의 자취방을 나왔습니다.
제 자취방으로 안내한 후 여기에서 자고 가라고 했습니다.
저는 핏빛 자취방으로 돌아가겠다고 했고요.
그녀는 가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날 살색 로맨스가 만들어지진 않았습니다.
알퐁스 도데의 <별>처럼 우린 밤새 대화만 나눴습니다.
하지만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사귀게 되었습니다.
새해에는 그녀와 첫 경험을 하기도 했고요.
크리스마스이브, 혈흔 낭자한 공간에서 사랑이 싹텄다니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 글의 교훈!
최선의 조건에서 최고의 결과가 나올 수는 있다.
하지만 환경만 탓해선 결과를 내기 어렵다. 피로 범벅이 된 방에서도 사랑의 씨앗은 싹틀 수 있다.
사람의 뇌는 위기 상황이 되면 주변에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는지 찾게 된다.
힘들 때 짜증을 내거나 나 몰라라 해서는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힘들 때 웃는 게 프로고, 힘들 때 작업에 들어가는 게 선수다.
간단 자기소개
직업 대학생
나이 24
성별 남
시기 작년 크리스마스
지난해 가을에 제대하고 복학을 준비하며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크리스마스에도 딱히 만날 사람이 없어서 평소처럼 심야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새벽 1시쯤 되었을까요?
편의점에 되게 예쁜 누나가 들어와서 담배를 샀습니다.
너무 예뻐서 계산하고 나가는 그녀를 따라 편의점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편의점 문 앞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들고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봤습니다.
예쁜 누나는 길 건너 포장마차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애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자의 옆자리에 딱 달라붙어 앉았습니다.
역시 크리스마스에 예쁜 여자가 혼자 있을 턱이 없지.
크리스마스는 차라리 없어져버려라! 솔로천국 커플지옥! 중얼거리며 담배 연기를 들이마셨습니다.
그래도 포장마차 쪽으로 자꾸 눈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포장마차에는 온통 커플들뿐이었습니다.
그녀 커플도 화기애애하게 술잔을 기울입니다.
씁쓸했지만 예쁜 여자를 보면 기분이 좋지요.
일하다가도 잠깐씩 나와서 저 멀리 그녀를 바라봤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쯤 지났을까요? 커플이 말다툼하는 게 보였습니다.
이유는 몰라도 움직임도 커졌습니다. 남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포장마차를 나섰습니다.
여자는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술잔을 들이켰습니다.
저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습니다.
너무 안되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지요.
갑자기 춥다는 게 느껴졌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서있던 겁니다.
편의점으로 돌아가려는데 그녀가 고개를 들더니 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뭘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깜짝 놀랐습니다.
그녀의 손가락이 까딱까딱 저를 불러댔습니다.
두리번거렸지만 주변엔 저밖에 없었습니다. 쭈뼛쭈뼛 길을 건너 포장마차로 들어갔습니다.
그녀는 다짜고짜 제게 소주잔을 건네더니 반말로 마시라고 했습니다.
포스에 눌렸던 걸까요? 전 ‘네...’ 대답하고 술을 마셨습니다.
그녀 앞에 앉으니 편의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손님이 들어오진 않을지 불안해하며 지켜봤습니다.
그녀가 화장실에 가자마자 저는 뛰어가서 편의점 문을 잠그고 나왔습니다. 옷도 갈아입었고요.
돌아온 그녀는 술값을 계산하더니 한잔 더 하자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네..’ 대답했습니다. 그녀가 저를 데려간 곳은 근처의 디자인호텔이었습니다.
술은 더 마시지 않았습니다.
남자친구와 크리스마스를 보내려고 잡아놓은 방이었나 봐요.
저는 그녀와 뜨거운 밤을 보냈습니다.
일이 끝난 후 그녀를 포옹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저를 밀쳐내며 가라더군요.
이번에도 저는 ‘네..’하고 옷을 주섬주섬 들고 호텔 방을 나섰습니다.
저는 누나의 이름도 모릅니다.
심지어 어쩌면 누나가 아닐지도 모르죠.
연락처를 따고 만남을 지속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포스는... 감히 그런 희망을 품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도 무슨 상관인가요?
그날 밤은 제 24년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순간이었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를 속으로 되뇌게 만들 정도로 말이죠.
이 글의 교훈!
아무튼 그녀에겐 애인이 있었다.
글쓴이가 특별히 뭔가를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애인 있는 여자를 정신 잃고 계속 바라보는 인간은 많지 않다.
간절함이 기적을 만든다.
얼마나 뚫어지게 쳐다봤으면 이런 기적이 일어나겠나?
너무 많은 남자들이 지레 포기해버린다.
용기 있는 자만이 미녀를 얻는다.
간단 자기소개
직업 취업준비생
나이 26
성별 남
시기 작년 12월 27일
올해는 직장인으로 변신할 줄 알았는데 코로나 때문에 한 해 더 집콕하게 된 26세 청년입니다.
지난 연말 취업에 실패하고 의기소침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이었죠.
당시 제 다크 포스는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6개월쯤 썸 타던 여인까지 제 어둠이 숨 막힌다며 떠나버렸을 정도였습니다.
썸녀와의 이별은 제 자존감을 무간지옥으로 떨어뜨렸습니다.
지옥을 배회하던 12월 27일,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던 여사친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술이나 한잔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었죠.
크리스마스까지 갓 지난 터라 우울증은 최대치로 치솟아 있었습니다.
세상은 내 주위만 빼고 반짝반짝 빛나는 듯했습니다.
그런 세상에 나가기 싫었습니다.
다음에 보자며 전화를 끊으려 했는데, 그녀는 오늘 반드시 술을 마셔야겠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저 못지않게 어두웠습니다.
유유상종이라고 다크한 인간들 사이엔 인력이 작용하는 걸까요?
저는 결국 그녀의 동네로 찾아갔습니다.
그녀도 저처럼 시커먼 롱패딩을 입고 있더군요.
우리는 돼지껍데기 집에 들어갔습니다.
조금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저를 불러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녀는 대답 없이 소주만 두세 잔을 들이켰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녀가 닭똥 같은 눈물을 돼지껍데기 위로 뚝뚝 떨어트렸습니다.
남자친구와 헤어졌답니다.
저와 다를 바 없는 어둠의 다크녀에게 남친이 있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습니다.
그런데 헤어진 이유를 들어보니, 제 썸녀와의 이별과 다를 바가 없더군요.
어둠이 빛을 몰아낸 것이었습니다.
저는 웃음이 터졌고, 그녀는 저를 매섭게 노려봤습니다.
돼지껍데기라도 던질 기세였습니다.
저는 비웃는 게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취업에 실패할 줄 몰랐고, 썸녀에게 차일 줄도 몰랐다고.
나처럼 우중충한 사람이 바로 앞에 있다니 기분이 이상해서 웃었다고.
이야기를 듣고 난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태로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렸습니다.
“병신.” “병신은 무슨. 똑같은 처지에.”
앞으로 잘 될 거라는 식의 뻔한 소리는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와 모처럼 공감대를 형성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얼마나 엿 같은지 가벼운 욕지거리를 주고받으며 술을 마셨습니다.
저는 사라진 아침이 거지같다고 했습니다.
백수에게 아침 햇살은 견디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정오 가까운 시간의 기상이 유쾌하진 않았습니다.
너무 밝은 시간에 눈을 뜨면 스스로가 무척 혐오스럽거든요.
그녀도 동감이라고 했습니다.
일찍 일어나기도 싫고, 늦게 일어나는 것도 싫으니 어쩔 줄 모르겠답니다.
그러면서 자기에게도 언젠가 브런치 있는 삶이 찾아올지 궁금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저는 “브런치 따위 뭐 대단하다고!” 라고 질러버렸고, 어쩌다보니 다음날 같이 브런치를 먹자는 쪽으로 분위기가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오바이트 하도록 술을 진탕 마신 백수와 백조가, 다음날 브런치를 위해 일찍 일어나는 게 말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브런치를 먹으러 가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자정도 되기 전에 돼지껍데기 집은 문을 닫았습니다.
우리는 모텔에서 술을 마시며 아침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모텔에 들어가자마자 우리는 계획과 달리 옷을 벗었고, 밤새도록 몸을 섞어댔습니다.
거의 아침이 다 되어서야 잠이 들었고, 두어 시간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몸도 마음도 더 없이 개운했습니다.
그녀도 뭔가 털어낸 것처럼 가뿐하다고 했습니다.
브런치는 개뿔. 우리는 뼈다귀해장국을 한 그릇씩 때리고 헤어졌습니다.
우리는 몇 번 더 만났고, 한두 번은 관계를 가졌지만 사귀게 되진 않았습니다.
올 가을에 그녀가 지방의 친척 회사에 취업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졌습니다.
그녀와의 섹스가 아주 짜릿했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가 경험했던 모든 섹스에서 뒤끝이 가장 상쾌했습니다.
지난 해 그녀와 보낸 밤을 가장 행복한 크리스마스라고 하진 못하겠습니다.
지금도 취업을 고민하고 있고, 여자친구도 없는 백수가 행복을 운운하는 것도 웃기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날 이후 제 마음에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내년에는 취업에 성공할 것이란 근거 없는 자신감도 있습니다.
행복까진 몰라도 기억에 남는 연말이었던 건 분명하겠죠?
이글의 교훈!
좋았겠다! 주변에 여사친을 많이 만들어둬야 한다.
다른 분들도 더 있다구요 !!
#2020년 12월호 #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