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여름,
'여은'이라는 이야기〉
여름의 한가운데,
우리는 여은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글 김대호 모델 여은 포토 치코
여은은 조금 달랐다. 단지 고운 피부나 정갈한 단발머리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의 첫 촬영 날, 여름비는 조용히 수영장을 적시고 있었다. 촬영장은 습기로 가득했고, 젖은 바닥 위로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지만, 여은은 마치 그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차분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화려한 연출 없이도, 그녀는 자신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젖은 머리카락, 살짝 비에 젖은 속눈썹 너머로
반짝이던 눈빛.
그 속엔 조금의 긴장도, 불편함도 없었다.
오히려 여름비와 함께,
여은은 더 선명하게 화면 안에 피어났다.
크레이지자이언트 전속모델로서의 첫 시작이었고, 짧게 자른 단발은 그녀의 새로운 계절을 알리는 상징 같았다.
여은은 어떤 변화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법을 안다.
그녀는 춤을 좋아한다.
몸을 움직이는 건 단지 끼가 많아서가 아니라,
진심이기 때문이다.
셔터가 눌리는 찰나의 순간,
그녀는 단지 포즈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움직인다.
그리고 여은에겐 언제나 두 마리의 반려견이 있다. 그녀가 사랑하는 작은 존재들. 이름만 불러도 웃게 되는 그 아이들은, 여은의 일상에서 가장 따뜻한 부분이다. 긴 촬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가장 먼저 반겨주는 것도,
그녀가 가장 먼저 찾는 위로도 바로 그 아이들이다.
“가끔은요, 그 애들 보는 것만으로 하루가 풀려요.”
그녀는 조용히 그렇게 말했다.
여은은 단지 예쁜 모델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만의 리듬으로 하루를 살아가고, 무대보다도 진짜에 가까운 순간들 속에서 스스로를 빛나게 만든다.
그날, 비 내리는 수영장 한가운데서
여은은 단단하게 서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날씨마저 자신에게 맞춰 움직이게
만드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여름의 비, 젖은 공기, 그리고 그 속의 여은.
그건 하나의 장면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였다.

크자 01. 여름 수영장에서의 촬영, 그날은 비까지 내려서 쉽지 않은 환경이었죠. 많은 모델들이 컨디션을 무너뜨릴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오히려 여은 씨는 그 모든 걸 자연스럽게 품은 느낌이었어요. 그날, 어떤 감정이었나요?
여은
맞아요, 쉬운 하루는 아니었어요. 물에 젖은 의상은 생각보다 무게감이 있고, 비 오는 날의 수영장은 실제로 굉장히 미끄럽거든요. 촬영 내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비 오는 풍경이 저에겐 낯설지 않았어요. 어릴 때부터 비를 좋아했거든요. 바깥이 고요해지는 그 분위기가 참 좋아요.
크자 02. 모델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건 헤어스타일일 때가 많죠. 특히 여성 모델에게 머리카락은 이미지의 상징이자 표현이기도 하고요. 여은 씨는 긴 머리에서 과감하게 단발로 스타일을 바꾸셨어요. 그 선택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었나요?
여은
저도 사실 머리카락에 애착이 많은 편이에요. 오랫동안 길렀던 머리를 자른다는 건 단순히 외모의 변화 이상이잖아요. 제겐 일종의 전환이 필요했던 시기였어요. 뭔가 새로운 챕터를 열고 싶다는 마음, 감정적으로든 에너지적으로든요. 머리를 자르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정돈됐어요. 미용실 거울 앞에 앉아 가위 소리를 들으면서, 그동안 내려놓지 못했던 감정들도 하나씩 잘려 나가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단발이 된 나를 보며, ‘그래, 이게 지금의 나구나’ 하고 웃었어요.
크자 03. 여은 씨는 춤을 정말 사랑한다고 들었어요. 단순한 취미를 넘어서, 무대가 아닌 공간에서도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춤은 언제부터 시작됐고, 지금 여은 씨에게 춤은 어떤 의미인가요?
여은
춤을 정확히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시점은 없는 것 같아요. 그냥 늘 제 안에 있었던 언어였던 것 같아요. 어릴 적부터 음악이 들리면 몸이 먼저 반응했어요. 엄마가 그러시더라고요. 세 살 때부터 쇼파 위에서 음악 나오면 어깨를 들썩였다고요. 본격적으로 무언가를 배운 적은 없어요. 하지만 제겐 항상 감정을 먼저 움직이는 통로가 몸이었어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음악에 얹혀 있으면, 저는 몸으로 그걸 풀어요. 그래서 춤은 저에게 표현의 도구이자, 감정의 피난처 같아요.
크자 04. 보통 사람들은 춤과 모델이라는 직업을 연결 지어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여은 씨의 포즈를 보면, 동작 안에 ‘멈춤’이 아니라 ‘흐름’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춤이 모델로서의 감각에 어떤 영향을 주나요?
여은
너무 공감되는 말씀이에요. 사실 저는 ‘포즈’라는 단어보다 ‘흐름’이라는 단어를 더 좋아해요. 셔터가 눌리는 찰나에도 저는 그 안에 계속 흐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춤은 몸의 리듬, 무게 중심, 긴장과 이완을 굉장히 예민하게 배우게 하거든요. 사진 한 장이 단절된 이미지가 아니라 그 앞과 뒤가 상상되게 만들려면, 몸 안에 ‘움직임의 감각’이 살아 있어야 해요. 그래서 저는 촬영 전 몸을 늘 푸는 편이에요. 그건 단순한 워밍업이 아니라, 마음을 흐르게 만드는 의식 같아요.
크자 05. 여은 씨는 두 마리의 강아지와 함께 살고 있죠. 외로운 날, 지친 날, 또 아무 일 없는 평범한 날에도 반려견은 가장 든든한 존재가 되어주잖아요. 그 아이들과의 일상은 어떤가요?
여은
솜이랑 뽀숑이는 저의 가장 소중한 루틴이에요. 하루가 아무리 바빠도, 어떤 일이 있어도, 저는 그 아이들 밥 주고 산책시키는 시간을 절대 놓치지 않아요. 사람들은 제가 촬영을 마치고 집에 가면 쉴 수 있겠다 말하지만, 진짜 ‘쉼’은 그 아이들이 저를 반겨줄 때예요. 강아지는 거짓이 없잖아요.
크자 06.
화보 촬영 현장에서 여은 씨를 보면 늘 스태프들과 자연스럽게 호흡하고, 전체 분위기를 조율하는 능력이 인상적이에요. 모델이라는 직업이 단순히 ‘예쁘게 찍히는 것’ 그 이상이라는 걸 몸소 보여주는 순간들이 많았죠. 여은 씨가 현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나 자세가 있다면요?
여은
저는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부터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한 장면이 나오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에너지를 쏟고 있잖아요. 그걸 느끼면 자연스럽게 ‘나만 잘하면 돼’라는 생각이 사라져요. 저는 최대한 흐름을 읽으려고 해요. 현장이 긴장감보단 따뜻한 긴장 속에 있으면 결과도 훨씬 좋아지더라고요. 그 분위기를 지키는 것도 모델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크자 07.
화보라는 건 결국 기록이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 사람의 일부를 담아내는 작업이잖아요. 여은 씨가 지금까지 찍은 수많은 장면들 중에서, 유독 마음에 남았던 컷이 있다면 어떤 순간이었을까요?
여은
비 오는 날, 손등을 타고 빗물이 흐르던 순간이 있었어요. 제가 일부러 만든 동작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손을 내렸는데 그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거든요. 포토그래퍼가 “그거, 멈추지 말고 그대로 있어 줘요”라고 했고, 저는 그냥 조용히 있었어요. 결과물을 봤을 때, 제 감정이 아무 말 없이 사진에 담긴 것 같아 놀랐어요. 그런 컷은 오래 남아요. 연출이 아닌 진심이라서요. 근데... 사실 저는 비를 좋아하지는 않아요...(웃음)
크자 08.
요즘같이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에, 많은 모델들이 더 강렬한 인상, 더 자극적인 표현을 선택하기도 하죠. 여은 씨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만의 색을 유지하고, 또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나요?
여은
저는 오히려 ‘세게’ 가려고 하지 않아요. 오래 기억되는 사람은 꼭 눈에 띄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저는 조용하게 스며드는 인상이 더 강하다고 믿는 편이에요. 나만의 무드는 결국 연출로 만드는 게 아니라, 제 안에서 우러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감정의 결을 솔직하게 담는 게 가장 나다운 차별점이죠.
크자 09.
반려견 이야기로 돌아가 볼게요. 강아지와의 일상이 여은 씨의 감정이나 루틴에도 영향을 줄 것 같아요. 두 아이와의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여은
산책 후에 아이들 물 마시고 나서, 둘 다 동시에 제 무릎에 털썩 앉을 때요. 그 시간이 너무 귀엽고 평화로워요. 바쁜 날엔 그 짧은 10분이 제 하루의 중심 같아요. 제가 어떤 하루를 보냈든 간에, 그 애들은 항상 같은 눈빛으로 저를 보거든요. 그게 저한테는 너무 큰 위안이에요.
크자 10.
자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매체는 무엇일까요? 사진, 영상, 춤, 혹은 그냥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을 때. 여은 씨는 어떤 순간이 가장 ‘여은답다’고 느껴지나요?
여은
음, 저는 말을 하지 않을 때요. 가만히 있을 때 제 감정이 가장 또렷하게 느껴져요. 춤을 출 때도 마찬가지예요. 말 대신 몸이 반응하니까요. 사진도 결국 말이 없는 기록이잖아요. 그런 매체들이 저에겐 편해요. 조용하지만 솔직한 방식이요.나니까 긴장보다 몰입이 앞섰어요. 어떤 눈빛을 해야 하고, 어떤 감정을 보여줘야 할지 자연스럽게 흐르더라고요. 그리고 결과물을 보는데… 낯설면서도 멋졌어요. ‘내가 이런 얼굴도 할 수 있구나’ 싶은, 좋은 충격이었죠.

크자 11.
여은 씨의 표정에는 늘 어떤 결이 있어요. 어떤 날은 말없이 단단하고, 어떤 컷에서는 순수하게 무너질 듯하고요. 그런 감정의 변화는 어떤 식으로 준비하고 끌어내시나요?
여은
미리 정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날의 날씨, 조명, 음악 같은 외부 요소를 흡수하면서 자연스럽게 꺼내는 편이에요. 억지로 감정을 만들면, 그건 오래 남지 않더라고요. 제 안에 잠들어 있던 감정이, 어떤 작은 자극을 통해 문을 여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저는 촬영장에선 자꾸 주변을 느끼려고 해요.
크자 12.
반대로, 감정을 꺼내기 어려운 날도 있잖아요. 몸이 지치거나 마음이 흐릿한 날, 그럴 땐 어떻게 자신을 리셋하나요?
여은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어요. 음악을 틀고 아무것도 안 해요. 생각도 멈추고, 그냥 침대에 누워서 빗소리나 강아지 숨소리 같은 걸 듣고 있어요. 그러다 보면 감정이 억지로 정리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가라앉아요. 그게 저만의 리셋법이에요.
크자 13.
많은 사람들이 ‘모델’이라는 직업을 외적으로만 화려하게 보곤 하죠. 하지만 실제로는 반복적인 자기 점검과 피드백, 감정 노동의 연속이잖아요. 여은 씨는 이 일을 어떻게 정의하고 계세요?
여은
저는 ‘지속 가능한 진심’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결국 내가 좋아서 해야 오래 버틸 수 있는 일이에요. 늘 비교당하고 선택받아야 하니까, 멘탈도 체력이고요. 그래서 전 이 직업을 ‘내면의 힘’으로 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화려함보다 정직함이 더 오래 간다고 믿어요.
크자 14.
무대는 아니지만, 카메라 앞에서도 분명 어떤 연기가 필요할 때가 있죠. 진짜 나와 연기된 나 사이에서 여은 씨는 어떻게 균형을 잡고 있나요?
여은
완벽히 ‘진짜 나’만 보여줄 수는 없죠. 그렇지만 ‘가짜’가 되지 않으려고는 해요. 감정을 연기하는 순간에도, 그 안에 제 진짜 경험이 들어가 있어야 해요. 저는 ‘연출된 진심’을 추구하는 편이에요. 감정을 연기하되, 진심으로 스며들게.
크자 15.
지금의 여은 씨를 만든 가장 중요한 요소 하나만 꼽는다면요? 누군가의 말일 수도 있고, 어떤 경험일 수도 있고요.
여은
“있는 그대로도 괜찮아”라는 말을 들었을 때요. 처음엔 당연한 말 같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날이 많거든요. 그 말을 듣고 나서, 제 단점도 장점처럼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게 제 가장 큰 전환점이었어요.

크자 16.
여은 씨의 화보를 보면, 카메라 앞에서의 감정이 매우 섬세하게 표현돼 있다는 걸 느껴요. 그런데 그 감정이라는 게 늘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아니잖아요. 때로는 ‘내가 지금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 걸까’조차 모호한 날도 있고요. 그런 날, 감정을 어떻게 끌어올리고 마주하세요?
여은
맞아요. 저도 그럴 때가 있어요. 특히 정신적으로 뭔가 분주한 날은, 감정이 흐르지 않고 정체된 느낌이 들거든요. 그럴 땐 억지로 끌어올리기보단, 오히려 멈춰요. 감정이 없을 땐 없는 그대로를 표현하려고 해요. 무언가를 연기하듯 만들어내기보단, 지금 내 안에 남은 잔여 감정—피로, 멍함, 고요함 같은 걸 솔직하게 드러내요. 오히려 그런 ‘무감정의 얼굴’이 더 많은 걸 이야기해주는 순간이 있더라고요.
크자 17.
보통 우리는 감정이라는 걸 겉으로 드러내야만 진짜라고 생각하곤 하죠. 웃고 울고 분노하고 기뻐하는 어떤 ‘표현’에 집중하게 되는데, 여은 씨는 그 반대 지점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처럼 보여요. 말 대신 눈빛으로, 설명 대신 여백으로요. 이런 방식의 ‘표현’은 스스로 어떻게 길러온 감각인가요?
여은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저는 감정이 겉으로 크지 않게 나오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걸 숨기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기로 했어요. 말이 없더라도, 표정이 크지 않더라도, 사람은 결국 무언가를 말하고 있잖아요. 그런 눈빛이나 미묘한 긴장감이 오히려 더 진실되다고 느낄 때가 많아요. 그게 저라는 사람을 표현하는 방식이라면, 그 결을 더 단단히 지켜나가고 싶어요.
크자 18.
이 직업을 오래 하다 보면, 칭찬보다 비교와 평가가 먼저 따라오는 순간들이 많잖아요. ‘예쁘다’는 말도 때론 피로해지고, ‘더 자극적이길’ 바라는 시선도 때론 무겁게 다가오고요. 그런 기준 속에서 여은 씨는 스스로를 어떻게 보호하고 지켜오셨나요?
여은
예전엔 솔직히 흔들렸어요. 주변에서 하는 말 하나하나에 마음이 휘청였고, 자꾸만 나를 객관화하려 들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평가에 내가 너무 흔들리면, 결국 내가 날 놓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아주 작은 루틴들을 정해서 지켜요. 좋아하는 노래를 아침마다 듣는다거나, 강아지들이랑 눈 맞추는 시간을 꼭 갖는다거나. 외부의 말보다 내 안의 감각에 더 집중하려고 해요. 그게 저를 지키는 방법이에요.
크자 19.
모델이라는 직업은 늘 누군가의 피사체로 서 있어야 하잖아요. 끊임없이 바라보이고 해석되는 존재로 살아야 하는데, 여은 씨는 그 시선 속에서 자신을 주체적으로 유지하는 힘이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어떤 방식으로 그런 균형을 만들어가고 있나요?
여은
제가 주체가 아니면, 이 일이 너무 힘들어져요. ‘보여지는 일’이지만, 그 중심에 내가 있어야 하거든요. 저는 촬영할 때마다 ‘이 컷이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장면인가?’를 먼저 생각해요. 남들이 좋아할 만한 포즈보다, 내가 설득당한 표정을 택하려고 해요. 결국 그 사진은 오래 남고, 그 사진 속 나를 가장 자주 마주하게 되는 사람도 저니까요. 그 시선의 중심에서 저를 지켜야 오래 버틸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크자 20.
춤을 사랑하고, 몸을 움직이는 감각에 민감한 여은 씨이기에 여쭤보고 싶어요. 몸이라는 건 단지 외형이 아니라, 기억과 감정을 저장하는 그릇이기도 하잖아요. 여은 씨에게 ‘몸’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여은
저는 몸이 감정을 가장 먼저 반응하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날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몸이 먼저 피로하거나 무거워질 때가 있거든요. 반대로 어떤 날은 기분이 좋을 땐 걷는 자세도 달라져요. 그래서 제 몸을 자주 살펴보는 편이에요. 마치 감정의 알림 같은 느낌으로요. 사진을 찍을 때도 마찬가지예요. 몸이 먼저 말하고, 그다음이 표정이거든요. 그래서 몸은 저에게 가장 정직한 언어예요.


〈비 오는 여름,
'여은'이라는 이야기〉
여름의 한가운데,
우리는 여은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글 김대호 모델 여은 포토 치코
여은은 조금 달랐다. 단지 고운 피부나 정갈한 단발머리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의 첫 촬영 날, 여름비는 조용히 수영장을 적시고 있었다. 촬영장은 습기로 가득했고, 젖은 바닥 위로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지만, 여은은 마치 그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차분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화려한 연출 없이도, 그녀는 자신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젖은 머리카락, 살짝 비에 젖은 속눈썹 너머로
반짝이던 눈빛.
그 속엔 조금의 긴장도, 불편함도 없었다.
오히려 여름비와 함께,
여은은 더 선명하게 화면 안에 피어났다.
크레이지자이언트 전속모델로서의 첫 시작이었고, 짧게 자른 단발은 그녀의 새로운 계절을 알리는 상징 같았다.
여은은 어떤 변화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법을 안다.
그녀는 춤을 좋아한다.
몸을 움직이는 건 단지 끼가 많아서가 아니라,
진심이기 때문이다.
셔터가 눌리는 찰나의 순간,
그녀는 단지 포즈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움직인다.
그리고 여은에겐 언제나 두 마리의 반려견이 있다. 그녀가 사랑하는 작은 존재들. 이름만 불러도 웃게 되는 그 아이들은, 여은의 일상에서 가장 따뜻한 부분이다. 긴 촬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가장 먼저 반겨주는 것도,
그녀가 가장 먼저 찾는 위로도 바로 그 아이들이다.
“가끔은요, 그 애들 보는 것만으로 하루가 풀려요.”
그녀는 조용히 그렇게 말했다.
여은은 단지 예쁜 모델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만의 리듬으로 하루를 살아가고, 무대보다도 진짜에 가까운 순간들 속에서 스스로를 빛나게 만든다.
그날, 비 내리는 수영장 한가운데서
여은은 단단하게 서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날씨마저 자신에게 맞춰 움직이게
만드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여름의 비, 젖은 공기, 그리고 그 속의 여은.
그건 하나의 장면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였다.
크자 01. 여름 수영장에서의 촬영, 그날은 비까지 내려서 쉽지 않은 환경이었죠. 많은 모델들이 컨디션을 무너뜨릴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오히려 여은 씨는 그 모든 걸 자연스럽게 품은 느낌이었어요. 그날, 어떤 감정이었나요?
여은
맞아요, 쉬운 하루는 아니었어요. 물에 젖은 의상은 생각보다 무게감이 있고, 비 오는 날의 수영장은 실제로 굉장히 미끄럽거든요. 촬영 내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비 오는 풍경이 저에겐 낯설지 않았어요. 어릴 때부터 비를 좋아했거든요. 바깥이 고요해지는 그 분위기가 참 좋아요.
크자 02. 모델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건 헤어스타일일 때가 많죠. 특히 여성 모델에게 머리카락은 이미지의 상징이자 표현이기도 하고요. 여은 씨는 긴 머리에서 과감하게 단발로 스타일을 바꾸셨어요. 그 선택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었나요?
여은
저도 사실 머리카락에 애착이 많은 편이에요. 오랫동안 길렀던 머리를 자른다는 건 단순히 외모의 변화 이상이잖아요. 제겐 일종의 전환이 필요했던 시기였어요. 뭔가 새로운 챕터를 열고 싶다는 마음, 감정적으로든 에너지적으로든요. 머리를 자르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정돈됐어요. 미용실 거울 앞에 앉아 가위 소리를 들으면서, 그동안 내려놓지 못했던 감정들도 하나씩 잘려 나가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단발이 된 나를 보며, ‘그래, 이게 지금의 나구나’ 하고 웃었어요.
크자 03. 여은 씨는 춤을 정말 사랑한다고 들었어요. 단순한 취미를 넘어서, 무대가 아닌 공간에서도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춤은 언제부터 시작됐고, 지금 여은 씨에게 춤은 어떤 의미인가요?
여은
춤을 정확히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시점은 없는 것 같아요. 그냥 늘 제 안에 있었던 언어였던 것 같아요. 어릴 적부터 음악이 들리면 몸이 먼저 반응했어요. 엄마가 그러시더라고요. 세 살 때부터 쇼파 위에서 음악 나오면 어깨를 들썩였다고요. 본격적으로 무언가를 배운 적은 없어요. 하지만 제겐 항상 감정을 먼저 움직이는 통로가 몸이었어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음악에 얹혀 있으면, 저는 몸으로 그걸 풀어요. 그래서 춤은 저에게 표현의 도구이자, 감정의 피난처 같아요.
크자 04. 보통 사람들은 춤과 모델이라는 직업을 연결 지어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여은 씨의 포즈를 보면, 동작 안에 ‘멈춤’이 아니라 ‘흐름’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춤이 모델로서의 감각에 어떤 영향을 주나요?
여은
너무 공감되는 말씀이에요. 사실 저는 ‘포즈’라는 단어보다 ‘흐름’이라는 단어를 더 좋아해요. 셔터가 눌리는 찰나에도 저는 그 안에 계속 흐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춤은 몸의 리듬, 무게 중심, 긴장과 이완을 굉장히 예민하게 배우게 하거든요. 사진 한 장이 단절된 이미지가 아니라 그 앞과 뒤가 상상되게 만들려면, 몸 안에 ‘움직임의 감각’이 살아 있어야 해요. 그래서 저는 촬영 전 몸을 늘 푸는 편이에요. 그건 단순한 워밍업이 아니라, 마음을 흐르게 만드는 의식 같아요.
크자 05. 여은 씨는 두 마리의 강아지와 함께 살고 있죠. 외로운 날, 지친 날, 또 아무 일 없는 평범한 날에도 반려견은 가장 든든한 존재가 되어주잖아요. 그 아이들과의 일상은 어떤가요?
여은
솜이랑 뽀숑이는 저의 가장 소중한 루틴이에요. 하루가 아무리 바빠도, 어떤 일이 있어도, 저는 그 아이들 밥 주고 산책시키는 시간을 절대 놓치지 않아요. 사람들은 제가 촬영을 마치고 집에 가면 쉴 수 있겠다 말하지만, 진짜 ‘쉼’은 그 아이들이 저를 반겨줄 때예요. 강아지는 거짓이 없잖아요.
크자 06.
화보 촬영 현장에서 여은 씨를 보면 늘 스태프들과 자연스럽게 호흡하고, 전체 분위기를 조율하는 능력이 인상적이에요. 모델이라는 직업이 단순히 ‘예쁘게 찍히는 것’ 그 이상이라는 걸 몸소 보여주는 순간들이 많았죠. 여은 씨가 현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나 자세가 있다면요?
여은
저는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부터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한 장면이 나오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에너지를 쏟고 있잖아요. 그걸 느끼면 자연스럽게 ‘나만 잘하면 돼’라는 생각이 사라져요. 저는 최대한 흐름을 읽으려고 해요. 현장이 긴장감보단 따뜻한 긴장 속에 있으면 결과도 훨씬 좋아지더라고요. 그 분위기를 지키는 것도 모델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크자 07.
화보라는 건 결국 기록이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 사람의 일부를 담아내는 작업이잖아요. 여은 씨가 지금까지 찍은 수많은 장면들 중에서, 유독 마음에 남았던 컷이 있다면 어떤 순간이었을까요?
여은
비 오는 날, 손등을 타고 빗물이 흐르던 순간이 있었어요. 제가 일부러 만든 동작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손을 내렸는데 그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거든요. 포토그래퍼가 “그거, 멈추지 말고 그대로 있어 줘요”라고 했고, 저는 그냥 조용히 있었어요. 결과물을 봤을 때, 제 감정이 아무 말 없이 사진에 담긴 것 같아 놀랐어요. 그런 컷은 오래 남아요. 연출이 아닌 진심이라서요. 근데... 사실 저는 비를 좋아하지는 않아요...(웃음)
크자 08.
요즘같이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에, 많은 모델들이 더 강렬한 인상, 더 자극적인 표현을 선택하기도 하죠. 여은 씨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만의 색을 유지하고, 또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나요?
여은
저는 오히려 ‘세게’ 가려고 하지 않아요. 오래 기억되는 사람은 꼭 눈에 띄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저는 조용하게 스며드는 인상이 더 강하다고 믿는 편이에요. 나만의 무드는 결국 연출로 만드는 게 아니라, 제 안에서 우러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감정의 결을 솔직하게 담는 게 가장 나다운 차별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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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견 이야기로 돌아가 볼게요. 강아지와의 일상이 여은 씨의 감정이나 루틴에도 영향을 줄 것 같아요. 두 아이와의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여은
산책 후에 아이들 물 마시고 나서, 둘 다 동시에 제 무릎에 털썩 앉을 때요. 그 시간이 너무 귀엽고 평화로워요. 바쁜 날엔 그 짧은 10분이 제 하루의 중심 같아요. 제가 어떤 하루를 보냈든 간에, 그 애들은 항상 같은 눈빛으로 저를 보거든요. 그게 저한테는 너무 큰 위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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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매체는 무엇일까요? 사진, 영상, 춤, 혹은 그냥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을 때. 여은 씨는 어떤 순간이 가장 ‘여은답다’고 느껴지나요?
여은
음, 저는 말을 하지 않을 때요. 가만히 있을 때 제 감정이 가장 또렷하게 느껴져요. 춤을 출 때도 마찬가지예요. 말 대신 몸이 반응하니까요. 사진도 결국 말이 없는 기록이잖아요. 그런 매체들이 저에겐 편해요. 조용하지만 솔직한 방식이요.나니까 긴장보다 몰입이 앞섰어요. 어떤 눈빛을 해야 하고, 어떤 감정을 보여줘야 할지 자연스럽게 흐르더라고요. 그리고 결과물을 보는데… 낯설면서도 멋졌어요. ‘내가 이런 얼굴도 할 수 있구나’ 싶은, 좋은 충격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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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은 씨의 표정에는 늘 어떤 결이 있어요. 어떤 날은 말없이 단단하고, 어떤 컷에서는 순수하게 무너질 듯하고요. 그런 감정의 변화는 어떤 식으로 준비하고 끌어내시나요?
여은
미리 정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날의 날씨, 조명, 음악 같은 외부 요소를 흡수하면서 자연스럽게 꺼내는 편이에요. 억지로 감정을 만들면, 그건 오래 남지 않더라고요. 제 안에 잠들어 있던 감정이, 어떤 작은 자극을 통해 문을 여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저는 촬영장에선 자꾸 주변을 느끼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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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감정을 꺼내기 어려운 날도 있잖아요. 몸이 지치거나 마음이 흐릿한 날, 그럴 땐 어떻게 자신을 리셋하나요?
여은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어요. 음악을 틀고 아무것도 안 해요. 생각도 멈추고, 그냥 침대에 누워서 빗소리나 강아지 숨소리 같은 걸 듣고 있어요. 그러다 보면 감정이 억지로 정리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가라앉아요. 그게 저만의 리셋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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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모델’이라는 직업을 외적으로만 화려하게 보곤 하죠. 하지만 실제로는 반복적인 자기 점검과 피드백, 감정 노동의 연속이잖아요. 여은 씨는 이 일을 어떻게 정의하고 계세요?
여은
저는 ‘지속 가능한 진심’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결국 내가 좋아서 해야 오래 버틸 수 있는 일이에요. 늘 비교당하고 선택받아야 하니까, 멘탈도 체력이고요. 그래서 전 이 직업을 ‘내면의 힘’으로 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화려함보다 정직함이 더 오래 간다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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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아니지만, 카메라 앞에서도 분명 어떤 연기가 필요할 때가 있죠. 진짜 나와 연기된 나 사이에서 여은 씨는 어떻게 균형을 잡고 있나요?
여은
완벽히 ‘진짜 나’만 보여줄 수는 없죠. 그렇지만 ‘가짜’가 되지 않으려고는 해요. 감정을 연기하는 순간에도, 그 안에 제 진짜 경험이 들어가 있어야 해요. 저는 ‘연출된 진심’을 추구하는 편이에요. 감정을 연기하되, 진심으로 스며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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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여은 씨를 만든 가장 중요한 요소 하나만 꼽는다면요? 누군가의 말일 수도 있고, 어떤 경험일 수도 있고요.
여은
“있는 그대로도 괜찮아”라는 말을 들었을 때요. 처음엔 당연한 말 같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날이 많거든요. 그 말을 듣고 나서, 제 단점도 장점처럼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게 제 가장 큰 전환점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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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은 씨의 화보를 보면, 카메라 앞에서의 감정이 매우 섬세하게 표현돼 있다는 걸 느껴요. 그런데 그 감정이라는 게 늘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아니잖아요. 때로는 ‘내가 지금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 걸까’조차 모호한 날도 있고요. 그런 날, 감정을 어떻게 끌어올리고 마주하세요?
여은
맞아요. 저도 그럴 때가 있어요. 특히 정신적으로 뭔가 분주한 날은, 감정이 흐르지 않고 정체된 느낌이 들거든요. 그럴 땐 억지로 끌어올리기보단, 오히려 멈춰요. 감정이 없을 땐 없는 그대로를 표현하려고 해요. 무언가를 연기하듯 만들어내기보단, 지금 내 안에 남은 잔여 감정—피로, 멍함, 고요함 같은 걸 솔직하게 드러내요. 오히려 그런 ‘무감정의 얼굴’이 더 많은 걸 이야기해주는 순간이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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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우리는 감정이라는 걸 겉으로 드러내야만 진짜라고 생각하곤 하죠. 웃고 울고 분노하고 기뻐하는 어떤 ‘표현’에 집중하게 되는데, 여은 씨는 그 반대 지점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처럼 보여요. 말 대신 눈빛으로, 설명 대신 여백으로요. 이런 방식의 ‘표현’은 스스로 어떻게 길러온 감각인가요?
여은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저는 감정이 겉으로 크지 않게 나오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걸 숨기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기로 했어요. 말이 없더라도, 표정이 크지 않더라도, 사람은 결국 무언가를 말하고 있잖아요. 그런 눈빛이나 미묘한 긴장감이 오히려 더 진실되다고 느낄 때가 많아요. 그게 저라는 사람을 표현하는 방식이라면, 그 결을 더 단단히 지켜나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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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직업을 오래 하다 보면, 칭찬보다 비교와 평가가 먼저 따라오는 순간들이 많잖아요. ‘예쁘다’는 말도 때론 피로해지고, ‘더 자극적이길’ 바라는 시선도 때론 무겁게 다가오고요. 그런 기준 속에서 여은 씨는 스스로를 어떻게 보호하고 지켜오셨나요?
여은
예전엔 솔직히 흔들렸어요. 주변에서 하는 말 하나하나에 마음이 휘청였고, 자꾸만 나를 객관화하려 들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평가에 내가 너무 흔들리면, 결국 내가 날 놓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아주 작은 루틴들을 정해서 지켜요. 좋아하는 노래를 아침마다 듣는다거나, 강아지들이랑 눈 맞추는 시간을 꼭 갖는다거나. 외부의 말보다 내 안의 감각에 더 집중하려고 해요. 그게 저를 지키는 방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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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이라는 직업은 늘 누군가의 피사체로 서 있어야 하잖아요. 끊임없이 바라보이고 해석되는 존재로 살아야 하는데, 여은 씨는 그 시선 속에서 자신을 주체적으로 유지하는 힘이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어떤 방식으로 그런 균형을 만들어가고 있나요?
여은
제가 주체가 아니면, 이 일이 너무 힘들어져요. ‘보여지는 일’이지만, 그 중심에 내가 있어야 하거든요. 저는 촬영할 때마다 ‘이 컷이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장면인가?’를 먼저 생각해요. 남들이 좋아할 만한 포즈보다, 내가 설득당한 표정을 택하려고 해요. 결국 그 사진은 오래 남고, 그 사진 속 나를 가장 자주 마주하게 되는 사람도 저니까요. 그 시선의 중심에서 저를 지켜야 오래 버틸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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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사랑하고, 몸을 움직이는 감각에 민감한 여은 씨이기에 여쭤보고 싶어요. 몸이라는 건 단지 외형이 아니라, 기억과 감정을 저장하는 그릇이기도 하잖아요. 여은 씨에게 ‘몸’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여은
저는 몸이 감정을 가장 먼저 반응하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날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몸이 먼저 피로하거나 무거워질 때가 있거든요. 반대로 어떤 날은 기분이 좋을 땐 걷는 자세도 달라져요. 그래서 제 몸을 자주 살펴보는 편이에요. 마치 감정의 알림 같은 느낌으로요. 사진을 찍을 때도 마찬가지예요. 몸이 먼저 말하고, 그다음이 표정이거든요. 그래서 몸은 저에게 가장 정직한 언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