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키 리저렉션

진키 리저렉션


30대쯤이라면 어디서 들어봤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오랜 팬일지도 모를 로봇물의 고참인 JINKI 시리즈의 신작이 나왔다. 

그것도 시리즈 두번째의 게임으로, 전작과 마찬가지로 원작자가 스토리에 참여한 와중에 ‘기존 스토리를 일부 리부트하여 다시 쓰는 루트’라는 언급이 있었다. 

전작 게임이 매우 큰 기대를 모았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화제성만큼의 내용물은 없었던 터라, 팬들 사이에서는 기대반 걱정반의 복잡한 심경으로 조심스레 뚜껑을 열어본 사람들이 많았다. 

필자도 그 중 한명이었다.



간만에 나온 진키 신작

 우선 시리즈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2000년도에 첫 연재를 시작하여 갖은 연재중단과 출판사갈이를 거듭하며 몇 년씩 걸려 연재를 한, 그야말로 애증의 작품이다. 

 시대를 앞선 미소녀+메카물이라는 조합과 꽤나 개념찬 주인공, ‘어른의 사정’으로 정말 감질맛나게 이어져온 스토리 등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코어팬을 만들기에 충분했고, 그 덕에 5~6년에 한번 꼴로 시리즈가 이어지는데다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우직하게 기다리는 팬들이 꽤 많은 편이다. 

 이번에 나온 ‘진키 리저렉션’은 2010년에 동 사에서 제작한 게임 ‘진키 익스텐드 리비전’ 발매 10년만에 나온 게임이며, 당시에도 일반향 만화를 에로게로 만든 것은 14년만의 일이라 꽤 주목을 받았던 적이 있다. 

 다만 게임 자체는 그렇게까지 완성도가 높지는 않고, 원작 팬이라면 충격을 받을 만한 내용이 있었지만 미디어믹스의 목적이 ‘기존 팬을 위한 팬서비스’만은 아님을 생각한다면 ‘성공’했다고 하기는 어려운 정도.

 작품 전체를 꿰뚫는 키워드가 확고한데, ‘모든 히로인들의 불행’이다. 

 결말이 어떻게 나건 간에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모든 히로인들은 정말 갖은 고난과 고행을 겪는다. 

 시리즈 중에는 연재 시작부터 전작의 서브히로인이 적에게 겁탈당하면서 시작하는 경우도 있었고, 아무 영문도 모른채 일본에서 베네수엘라까지 납치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나마 원작은 일반향 만화이었기에 어느정도 필터링된 묘사에서 끝났지만, 대놓고 18금 딱지를 달고 나온 게임에서는 그런 거 없다. 

 이 부분은 20년간 꾸준히 팬심을 가지고 따라오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할 정도라, 후에 이야기할 ‘능욕회피 시스템’이 등장하는 원인이 된다.


<H씬이 대략 10개쯤 되는데, 그중 5개 이상이 능욕이다. 능욕이 아니라도 곱게 넘어가는 파트는 거의 없을 정도>


스토리 시점은 2부 동경편 이후의 새로운 시나리오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3부 스토리는 ‘없었던’걸로 하고 새로이 전개된다. 

덕분에 3부에서 리타이어했던 주인공 료헤이와 히로인 아오바가 다시 돌아왔으며, 그 소식만으로도 수많은 진키덕후들이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게임 시스템은 크게 3파트로 나뉘는데, 하루 시작지점에 강제적으로 전개되는 공통 스토리, 공통스토리가 끝나고 나면 유저가 피로도에 맞춰 일정을 선택하는 일상파트, 일상을 마무리하고 취침을 선택하면 전개되는 야간 파트로 나뉜다. 

 이 구조를 30일간 반복하면서 히로인과의 호감도를 올리고, 적절하게 훈련 메뉴를 선택하여 히로인의 전투 능력을 육성하여 최종적으로 원하는 엔딩에 안착하는 것이 본 게임의 목적이다. 

 전투능력이라고 해서 특별할 건 없고, 단순히 보이지 않는 전투력이 존재하고, 그 전투력에 따라 특정 분기점에서 배드엔딩으로의 분기가 선택된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그 배드엔딩 루트에 대체로 능욕이 섞이는데, 옵션에서 ‘능욕회피 시스템’을 ON해둔다면 적당히 짧은 묘사만으로 해당 파트를 넘어갈 수 있다.

 분기에 따라 히로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맨 처음에 공략할 히로인을 골라 찍은 다음 줄창 한우물만 파는 방식이라, 일반적인 연애 시뮬레이션을 생각한다면 좀 당황할 것이다.



 이 파트별 전개가 게임 전체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는데, 아침/점심/저녁 스토리가 다 따로 놀게 된다는 것이다. 

 아침에는 심각한 얼굴로 진키를 조종하고 총을 쏴서 적을 죽이고, 점심에는 히로인과 꽁냥꽁냥하면서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옷가게에서 쇼핑을 하고, 저녁에는 뜬금없이 침대에 난입한 히로인을 상대한다? 

 상상만 해도 어이가 없는데 그 어이없는 전개를 맛보게 된다.

 

 심지어 점심 파트는 12지점 중 2~3곳을 골라 행동이 가능한데, 각 지점마다 이벤트 패턴이 3~9가지가 있으며, 완전한 공략 재현을 위해서는 수천번 단위로 게임을 리셋해야 한다는 골치 아픈 문제가 있다. 

 그와중에 문제는 ‘각 이벤트마다 히로인의 호감도 증감이 다 다르다’는 것이고, 그나마 다행인 점은 대부분의 점심 이벤트는 일자 지정이 없다는 것과 히로인의 호감도 커트라인이 생각보다 낮다는 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최소 수천~수만분의 1을 뚫고 공략을 완벽 재현하는데에는 어마무시한 시간이 걸리고, 결국 해외에서도 정석적인 공략 작성을 포기한 상태다.

 그리고 대체로 전투는 아침 파트에 등장하는데, 파트 나눔의 문제로 인해 전반적으로 볼륨이 작다 보니 전투 묘사가 많이 아쉬운 점이 있다. 

 히로인 스탠딩CG에 E-mote를 사용해서 움직이는 것까지는 매우 만족스러운데, 정작 전투 씬에서는 메카닉의 스틸컷과 함께 몇 종류의 이펙트만 번쩍일 뿐이고 몇 줄의 텍스트로 전투 묘사가 끝난다.

 


 마치 16년전의 작품인 Fate/stay night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면서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게 몇 년도인지 확인하게 만드는 부분은 실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전투 묘사에서 시점이 난잡하게 이동하는 점 또한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어쩌다 이모양이 되었는가

 팬층이 심하게 고인 팬덤의 문제점 중 ‘내가 아니까 너도 알 거야’가 있다. 

 이 작품, 20년이나 이어진 팬덤을 너무 심하게 믿어서, 독립된 작품으로 성립이 안 될 정도로 스토리가 불친절하다. 

 1부, 2부의 이야기는 물론이요, 히로인들의 과거나 진키 등의 세계관 설명에 대해서도 머리를 감싸쥐고 싶을 정도로 설명이 부족하고, 

 심지어 본 작품 내에서의 세부묘사마저도 부족하다. 

 스토리 전반이나 과거 설명이 부족한건 충분히 썰을 풀 정도로 볼륨을 주지 않는 게임 구조가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지만, 세부묘사가 부족한건 게임의 체감 퀄리티에 치명적인 감점 요소가 된다. 

 단순히 묘사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라고 하긴 좀 애매하고, 작가가 ‘내 머릿속에선 이렇게 그려지는데, 너희들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지?’하고 대강 줄여적은 느낌이라, 한 20분쯤 잡고 있다 저 메시지를 깨닫고 난 후면 쇠망치로 머리를 후려맞은 느낌이 든다. 

 나름 설정자료를 만화 방식으로 풀어 내는 부분은 노력을 한 느낌이지만, 그마저도 ‘여백의 미’가 넘치는 느낌이라 시리즈 전체를 꿰고 있는 팬이 아니라면 범접할 수 없는 난이도임은 틀림없다.


 앞에서 언급했던 전투 씬 이야기 또한, 발더 하트/발더 브링거/발더 에이스로 내리 이어지는 3연속 패망을 겪은 GIGA사는 더 이상 메카 배틀물을 만들어낼 여력이 없음을 다시금 시사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직접 전투를 조작하는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중간중간 전투 애니메이션을 넣어줬더라면 이렇게까지 심각한 인형극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몇십년 된 IP에 그정도로 투자할 만한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지만, 진키 리저렉션 발표 직후에 팀 발더헤드의 신작 제작소식을 발표할 요량이었으면 ‘우린 아직도 건재하다’는 걸 실물로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줄창 비판만 했는데, 시리즈 팬일 경우에는 팬디스크라고 생각할 경우 의외로 만족할만한 내용물이긴 하다. 

 수많은 논란을 낳았던 3부를 리부트하고 2부에서 뒷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점, 정통성 있는 주인공과 히로인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 곳곳에 시리즈 전반을 꿰뚫는 떡밥이 스쳐지나간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플레이해볼 가치가 있다. 

 솔직히 20년간 연중을 밥먹듯 하던 시리즈를 여지껏 지키고 따라온 팬이라면 이정도 고난쯤이야 웃으면서 넘길 수 있을 것이다. 

 CG는 두말할 것 없이 수려하고, E-mote는 웬만한 버튜버 수준으로 깔끔하게 뽑혔으며, 준수한 품질의 사운드와 성우들의 연기 또한 나쁘지 않았다. 

<너무 버튜버 냄새가 나서 문제지. 어딘가의 fxxx you! AI를 떠올리게 하는 표정이 작품 내내 나온다>


 문제라면 정말 오랜만에 나온 시리즈물이라는 것과, 한 시대를 풍미한 메카물의 거장 GIGA에서 제작을 맡았기에 기대치가 너무 높았다는 게 문제였으리라.

  4.5기가나 되는 적지 않은 용량임에도 불구하고 공략 가능한 히로인은 세 명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스토리상 다양한 분기가 있는 편이 아니라 ‘포만감’은 상당히 낮은 편이다. 

 하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는 해도, 그 집의 20년된 식혜 맛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찾아보게 될 것이다.

<지금 봐도 메카닉 디자인은 정말 멋지게 잘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