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컬로이드

보컬로이드

 

21세기이기 때문에 등장할 수 있었던 새로운 시대의 전자가희, 보컬로이드. 

이제는 대를 이어 전해지는 어엿한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by 사요

 

 우리나라에 비해 일본이 오타쿠적인 문화에 관대하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실은 그 이상이다. 

 단순히 관대한 수준이 아니라 지하철이나 관공서의 이곳저곳에서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작품들의 광고물이 붙어있는 건 물론이고, 종종 공공광고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얼굴을 비추는 일본의 캐릭터들.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캐릭터를 꼽으라면 하츠네 미쿠를 빼놓을 수 없다. 

 하츠네 미쿠는 지하철이나 관공서가 아니라 훨씬 굵직한 도쿄시의 관광 브랜드나 2020 올림픽 등의 쟁쟁하기 그지없는 행사에도 등장할 정도의 빅 네임이기 때문이다. 

 그 지명도는 단순히 일본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이기도 한데, 그 유명한 <타임지>에서 헬로 키티나 곰돌이 푸를 제치고 가장 영향력 있는 가상 캐릭터 8위로 선정한 기사를 냈었을 정도. 

 하지만 이 하츠네 미쿠는 사실 보컬로이드라 불리는 음향 프로그램의 이미지 캐릭터에 지나지 않았는데, 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보컬로이드, 그 시작은 미약하였지만...

 흔히 보컬로이드라고 하면 미쿠를 비롯한 수많은 캐릭터 시리즈를 떠올리지만, 엄밀히 따지면 보컬로이드는 일본을 중심으로 개발된 음향 프로그램의 시리즈군을 뜻한다.

 2004년 처음 등장한 이 프로그램은, 간단히 설명하면 미리 녹음해둔 사람의 목소리를 음표와 발음 정보에 맞춰 합성해서 출력하는 장치다. 

 이제는 인터넷 방송의 도네 목소리로 유명한 TTS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글을 읽는 것이 목적인 TTS와 달리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 

 여기까지만 보면 평범한 음악 제작 지원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보컬로이드는 ‘목소리 합성을 위한 소리 데이터를 제공한다’는 기본적인 발상을 뛰어넘어 ‘기계가 노래를 대신 불러주자’는 발상의 전환을 이루어냈다.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보컬로이드 캐릭터들의 시작이 되었다.


 최초로 보컬로이드를 낸 회사는 영국의 Zero-G로 알려져 있지만, 지금의 보컬로이드 시장의 토대를 만든 것은 일본의 크립톤 퓨처 미디어이다. 

 사운드에 머무르지 않고 이미지 캐릭터를 처음으로 낸 것도 여기다. 

 당시에는 음악 프로그램에 왜 모에를 끼얹느냐며 반발도 많았고 판매량도 그리 시원치 않았지만, 2007년에도 나온 미쿠가 말 그대로 대박을 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는 보컬로이드의 성능 자체가 향상된 것도 있었지만, 당시 일본 내수 동영상 시장을 독점하고 있던 니코니코 동화에서 미쿠 붐이 불었던 것이 컸다. 


 결국 초기 예상 판매량 천장이던 음악 지원 프로그램이 1년 만에 3만 장 이상을 판매하는 대박을 쳤고, 그 이후 린/렌이나 루카 같은 크립톤 퓨처 미디어의 후속작은 물론, 다른 회사들도 보컬로이드 열풍에 동참하기 시작하면서 수십 명의 보컬로이드가 2020년인 지금까지도 계속 발매되고 있다. 

 그걸 정말 음악 제작자들만 사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노래를 넘어선 종합 캐릭터 엔터테인먼트

 보컬로이드, 특히 미쿠는 왜 그렇게 대박을 쳤을까?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예를 들면 음원을 제공한 성우 후지타 사키의 목소리가 좋았다, 

 기술력의 향상으로 인해 평범하게 좋은 노래들이 나와서 잘 알려지기 시작했다, 음악 제작자들이 편리하게 자신의 노래에 보컬을 붙일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주었다, 동영상 사이트에서 서브컬처 붐이 일었다, 캐릭터 자체의 매력이 어필했다, 100만 재생을 넘어가는 수많은 명곡들이 있었다 등등 수많은 이유를 언급할 수 있다. 

 모두 틀린 말이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서는 다른 점을 언급해두고 싶다. 

 그것은 바로 제작자가 그저 음성 합성을 하는 것을 넘어서, 이미지 캐릭터를 가지고 노래 그 이상의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보컬로이드만의 특징이다.


 미쿠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당시에 인기를 끌었던 보컬로이드 창작물을 보면, 많은 경우가 단순히 노래가 좋아서 유명해진 것이 아니었단 사실을 알 수 있다. 

 보컬로이드 프로그램의 결과물은 말 그대로 보컬뿐이지만, 동영상으로 실제 투고된 작품들은 거기에 뮤직비디오 영상이나 작가의 고유한 캐릭터의 설정 등 다양한 요소가 덧붙여진 일종의 종합선물세트였다. 

 특히 노래의 화자와 실제 가수를 동일시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메리트가 있었는데, 덕분에 제작자들은 미쿠를 비롯한 다양한 이미지 캐릭터들을 자신의 음악적 세계의 주인공들처럼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당시 히트한 작품들은 노래가 좋은 건 기본이고, 거기에 자체적인 세계관이나 스토리로서의 작품성까지 지닌 영상들이 많았다. 

 아예 보컬로이드와는 전혀 관계없이 단독으로 애니메이션까지 나왔던 블랙 록 슈터가 그 좋은 예다. 

 이렇게 단순히 노래의 영역을 넘어 즐길 수 있는 무언가를, 그것도 다양한 소비자들이 자유롭게 창작하면서 즐길 수 있도록 제공했다는 점이야말로, 보컬로이드 열풍을 논할 때 빼놓으면 안 되는 요소 중 하나일 것이다.


이름만 나열해도 끝이 없는 수많은 보컬로이드들

 이렇게 성공한 보컬로이드는, 그 성공을 뒷받침하듯이 미쿠 이후에도 수많은 프로그램과 캐릭터들이 탄생해왔다. 

 사실 너무 뜨다 못해서 미쿠 이전에 나왔던 제품들까지 재조명을 받았을 정도인데, 크립톤 퓨처 미디어에서 미쿠를 앞뒤로 낸 메이코, 카이토, 미쿠, 린과 렌 남매, 그리고 루카 정도가 일종의 본가 포지션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들은 보컬로이드 관련 미디어믹스에도 같이 나올 정도로 사이가 좋아서, 팬들 사이에선 아예 일종의 가족 같은 관계로 인정받고 있다. 

 심지어 이들은 사후 지원도 충실해서, 수년마다 버전업된 프로그램이나 추가 확장팩들이 꾸준히 발매되고 있기도 하다. 

 당장 미쿠만 해도 발매 9년이 지난 2016년에 4번째 버젼이 등장했을 정도니까. 

 그래서 사실 보컬로이드라고 하면, 일반적으로는 위의 언급한 본가 캐릭터들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외에도 인지도가 있는 유명 보컬로이드들이 있는데,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유명 가수 각트의 음성 데이터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가쿠포이드. 보컬이 아닌 보이스로이드로서 더 유명해서, 제작자가 연출한 영상의 대본을 보이스로이드가 읽어나가는 실황 플레이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유즈키 유카리. 

 동북 지방의 홍보용 보컬/보이스로이드로서 활약한 도호쿠 즌코. 서브컬쳐 계에서 유명한 가수 Lia의 목소리를 수록한 것으로 알려졌던 IA 등이 대표적이다. 

 미쿠의 성공 이후 일본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지원하는 보컬로이드도 발매되었는데, 한국어를 지원하는 보컬로이드로서 시유와 유니가 무려 SBS의 협력을 받아 발매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영어, 스페인어, 중국어 등 다양한 언어를 지원하는 여러 보컬로이드가 존재하니, 정말로 글로벌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양한 미디어믹스와 사회 참여

 이렇듯 다양한 인기요소와 배리에이션이 있지만, 어쨌든 미쿠가 그저 음악 지원 프로그램일 뿐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발매부터 13년 내내 계속 이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아무래도 분야의 특성상 지금만한 인기가 있었을까가 매우 의문스러운 부분. 

 지금과 같은 인기가 형성된 데에는, 그만큼 다양한 미디어믹스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먼저 09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져 온 리듬 액션 게임 프로젝트 디바/미라이 시리즈를 필두로 하는 수많은 게임들이 있다. 

 사실 보컬로이드가 메인이 아닌 다른 게임에 콜라보 형식으로도 자주 참가하기 때문에, 요즘은 이쪽으로 미쿠를 알게 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스마트폰이 대세인 요즘 추세에 발맞춰 모바일 게임도 다양하게 출시되어 있는데, 최근에는 프로젝트 세카이 컬러풀 스테이지! 란 모바일 게임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고.

 하지만 보컬로이드의 확장은 이런 게임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데, 이건 보컬로이드의 제작회사나 스폰서들이 이리저리 다른 곳에 얽힌 영향이 컸다. 

 예를 들어 삿포로 눈 축제에 관련 회사가 참가한 게 계기가 되어 매년 발매되고 있는 유키미쿠, 레이싱 대회에 스폰서로 붙은 덕에 역시 매년 나오고 있는 레이싱 미쿠가 그 좋은 예다. 

 보컬로이드의 본진이라 할 수 있는 음악에서도 미쿠를 홀로그램으로 출연시킨다거나 클래식 곡으로 편곡된 노래들을 연주하는 등의 다양한 콘서트들이 최근까지도 꾸준히 열리고 있는데, 일본만이 아니라 미국, 중국, 멕시코, 캐나다, 인도네시아 등 다양한 외국에서도 이런 행사가 있었다는게 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영향력에 주목한 기업들도 하나둘씩 보컬로이드, 특히 미쿠를 광고 모델로 영업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점인데 소니나 도요타 같은 일본 기업은 물론 심지어 구글조차 미쿠와 협업한 사례가 있었다니, 얼마나 보컬로이드가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이 정도면 충분히 설명이 되지 않을까?


다음 세대로 이어져가는 하츠네 미쿠의 유산

 지금까지 알아봤듯이, 미쿠로부터 시작된 보컬로이드 문화는 하나의 장르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영향을 끼쳐왔다. 

 그 영향이 단순히 서브컬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중요한 점인데, 일본이 서브컬처에 관대한 분위기란 걸 감안하더라도 특히 미쿠는 일반인들에게도 노출이 굉장히 잦은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미쿠 발매 후 13년이 지난 지금 이 시기, 프로젝트 세카이의 성우가 ‘어렸을 때 보컬로이드 영상을 보고 팬이 되었다’고 발언한 것이 소소한 화제가 되었다.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사람이 자연스럽게 애니메이터가 되는 것처럼, 이제는 보컬로이드도 선순환을 이어갈 수 있는 어엿한 장르로 자리잡았단 하나의 증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