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초의 원조 - 어니스트 헤밍웨이

마초의 원조 

어니스트 헤밍웨이


짧고 간결하다 못해 딱딱 끊어지는 ‘스타카토 문장’이 헤밍웨이의 트레이드마크다. 

번역이라고 해도 헤밍웨이의 작품을 읽고 문장을 곱씹어보면

인터넷 댓글을 엄청나게 잘 쓰는 리플러로 변신할 수 있다!

by 이정미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와 더불어 ‘길 잃은 세대(Lost Generation)’의 대표작가로 꼽힌다. 

 하드보일드 스타일(쉽게 말해 건조할 정도로 간결한 문체라는 뜻이다)의 원조 격인 헤밍웨이는 한때 전쟁 영웅이 되기를 꿈꾸었던 적도 있다. 

 아마 당신도 <노인과 바다>는 들어봤을 거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노벨문학상 작가로만 알고 있기에는 아까운 인물이다. 

<쿠바 하바나의 단골 바에 놓인 헤밍웨이의 동상>

스페인, 프랑스, 미국, 쿠바 등 헤밍웨이가 머물었던 곳에는 반드시 헤밍웨이의 단골 술집이 있다.


1. 그는 미국 정부로부터 청동성장(Bronze Star)를 받았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는 전쟁터에서 그럴 듯한 공훈을 세우지는 않았다. 

 이 청동성장은 그가 전쟁 당시 언론인으로서 용기 있는 행동을 한 것을 기념하여 수여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쟁범죄로 고발당하기도 하였다

 놀랍게도 그는 호텔방에 무기를 비축하고, 저항군을 이끌고, 언론인으로서의 신분증을 제거한 혐의로 중죄에 연루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었다. 


3. 거트루드 스타인은 그의 아들 잭의 대모가 되기도 하였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로스트 제너레이션 작가들의 정신적 지주라고도 할 수 있는 모더니즘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그녀는 1903년에 프랑스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 예술운동의 비호자가 되었다. 

 그녀의 이름을 알아 두는 것은 당신을 꽤나 지적인 것처럼 보이게 할 것이다. 


4. 그는 리츠호텔에 머물렀던 시절에 쓴 메모들에서 영감을 얻어 소설을 썼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대표작 중 하나인 <파리는 날마다 축제(A Movable Feast)>는 그가 젊은 시절 머물렀던 호텔 침대 밑의 트렁크에서 발견한 메모로부터 시작되었다. 

 헤밍웨이 같은 문재가 되기는 어렵더라도 나중에 뭐 라도 써보려면 기록하는 습관을 들이자. 


5. 한때 SNS에서 유명했던 ‘아기신발(Baby Shoes)’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누군가가 헤밍웨이에게 내기를 걸었다고 한다.

  “여섯 단어로 소설을 써 서 사람들을 울릴 수 있다면 당신이 이긴 것이다.” (도대체 이런 내기를 왜 거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헤밍웨이는 냅킨에 이렇게 썼다고 전해진다. 

 “아기 신발, 한 번도 사용한 적은 없어요(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사실이 아니라면 이 이야기를 지어낸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을지 매우 궁금하다. 


6. 헤밍웨이는 네 명의 여자와 결혼하였다 

 심지어 그는 이혼을 한 같은 해에 재혼을 하였다. 

 이런 것까지 본받을 필요는 없다.


7. 그의 마지막 말은 “Goodbye my kitten”이었다

 그는 이 말을 마지막 아내인 메리에게 했다. 

 이렇게 보면 나름 로맨티스트인 거 같기도 하고…… 


8. 그는 18살에 기자가 되었다

 그는 소설 작가가 되기 이전에 기자였다. 

 그리고 무려 18세부터 언론인으로서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그때의 경험은 그의 문체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8세에 신문도 안 읽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른가 보다.


9. 그는 그의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 ‘Papa’라고 칭하였다. 

 도대체 왜?


10. 그는 어릴 적에 꽃무늬 원피스를 입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가 딸을 너무나도 원했기 때문에 그녀는 헤밍웨이에게 귀여운 여아용 원피스를 입혔다. 

 심지어는 그를 여자아이의 이름으로 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 살때부터 아버지와 사냥을 다녔다. 

 타고난 마초기질은 어쩔 수 없었다. 


11. 그녀의 어머니는 그가 첼리스트가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훗날 그는 자신의 첼로 연주를 세상에서 가장 끔찍했다고 회상한다. 

 이쯤 되면 그가 비뚤어지지 않고 잘 큰 게 신기할 정도이다.


12. 그는 일차세계대전 동안에 앰뷸런스를 운전했다

 그의 대부분의 업무는 시체를 운반하는 것이었다. 

 1918년 그는 박격포에 의해 부상을 입고 다리에 포탄의 파편이 박혀 여러 번의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그는 전쟁에 직접 참여하고 싶어했지만 시력이 나빴기 때문에 그러지 못하였다. 


13. 그는 다지증이 있는 고양이들을 좋아하였다

 물론 그가 다지증이 있는 고양이만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고양이 애호가였고, 그의 첫 동반묘의 이름은 ‘스노우볼’이었다. (심슨 가족에 등장하는 고양이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아무튼 고양이는 항상 옳다. 


14. 그는 사냥 외에도 낚시를 좋아하였다

 <노인과 바다>에도 그의 낚시와 바다에 대한 애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15. 그는 낚시에 있어서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청새치를 잡는 것은 낚시꾼들에게 있어서 위험한 게임이다. 

 그러나 그는 일곱 마리의 청새치를 하루만에 잡으면서 세계 기록을 세웠다. 

 청세치는 평균 11피트(약 3미터정도)이고, 200~400파운드(90~180kg)나 나간다. 

 청새치는 가장 크고 빠른 물고기들 중에 하나이다.  


16. 그는 서서 글을 썼다

 대부분의 작가는 앉아서 작업을 한다. (너무 당연해서 문장으로 쓰니 바보 같아 보인다.) 

 그러나 이 마초 작가는 보통 그의 침실에서 일어선 채로 작업을 하였다. 


17. 그는 수많은 병을 앓았다

 그는 말라리아, 탄저병, 폐렴, 신장파열, 간 파열, 두개골 골절, 척추부상, 피부암, 그리고 간염을 앓았다. (어마어마한 라인업이 아닐 수가 없다.) 

 심지어는 세 번의 차 사고와 비행기 충돌도 있었다. 

 그를 빼고 파란만장한 삶을 논한기는 어려울 것 같다. 


18. 그는 자신의 작품이 영화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영화로 만들어진 <노인과 바다>를 보고 굉장히 실망하였다. 

 그는 노인이 쿠바 어부처럼 보이지 않고, 그냥 부자인 늙은 배우처럼 보인다고 혹평하였다. 

 노인 역을 맡았던 트레이시는 그냥 웃고 말았는데, 그가 오스카에 지명되었기 때문이다. 


19. 그는 피츠제럴드의 성기를 본 적이 있다

 피츠제럴드의 아내인 젤다가 그의 성기가 작다고 불평하였기 때문에, 피츠제럴드는 친구였던 헤밍웨이에게 감식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냥 ‘평균사이즈’였다고 한다. 


20. 그는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의 아버지가 한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모히또 칵테일은 헤밍웨이가 좋아하면서 유명해졌다. 헤밍웨이와 모히또에서 몰디브 한잔 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헤밍웨이의 집에는 키우던 고양이들의 묘지가 있다. 무덤 뒤로 헤밍웨이가 타던 낚시 보트도 보인다.


스페인 팜플로냐의 헤밍웨이 단골 바. 지금도 헤밍웨이가 즐겨 먹던 햄버거를 팔고 있다. 스페인까지 가서 왜 햄버거를 먹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