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PG 완전 정복

TRPG 완전 정복


컴퓨터 게임과 비교를 거부하는, 무궁무진한 자유도의 원조 RPG를 탐방한다. 신나고 재미난 역할극에 빠져보자.

by 사요

 


당신이 플레이하는 그 게임, 어쩌다가 RPG란 이름이 붙었는지 알고 있는가? 

RPG, 풀어서 롤플레잉은 게임 좀 해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장르다. 

롤플레잉은 엄청난 걸작 게임의 앞에도 당연하다는 듯 수식어처럼 붙어 다니는 단어이기도 하다. 

<젤다의 전설>이나 <파이널 판타지>, <발더스 게이트>와 <엘더스크롤> 등 셀 수도 없는 명작 게임들이 롤플레잉 장르에 속해 있다. 

도대체 롤플레잉이 뭐기에 세계관이나 이야기의 방향성, 게임의 목표 등 세부사항은 전혀 겹치지 않는 수많은 작품들을 하나로 묶어 통칭하는 걸까?


자, ‘영어가 가장 쉬웠어요’를 구사해보자. 

흔히 RPG라 부르는 이 장르를 영어로 풀어써보면 Role-Playing Game이다, 우리말로는 '역할 연기 게임'이라 번역할 수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것만으론 의문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대체 내가 게임을 하는 것과 역할을 연기하는 게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사실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선 우리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RPG의 원조가 되는 것을 알아봐야 한다. 

바로 오늘의 주제, TRPG - Tabletop Role-Playing Game 말이다.


Role-Playing이란 무엇인가


데스크톱과 랩톱은 들어봤을 거다. 

데스크톱은 책상(데스크)+위(톱), 랩톱은 무릎(랩)+위(톱)를 합한 단어다. 

둘 다 컴퓨터이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데스크톱은 책상 위에 올려두고 쓰도록 큼직하게 만들었고, 랩톱은 무릎을 부숴버리지 않도록 가볍게 만든 게 차이다.


옛날 옛적 우리 조상들은 자나 깨나 광활한 만주벌판이나 개마고원에서 힘차게 뛰어다니며 호연지기를 과시하셨을까?

당연히 아닐 거다. 

스포츠마니아 조상님이라면 그랬을지 모르지만 힘든 걸 싫어하는 조상님도 계셨을 테고, 이 분들은 바둑이나 장기처럼 탁자 위에서 하는 게임으로 소일하셨을 거다. 

서양인들도 마찬가지다. 

탁자에 마주앉아 게임을 하곤 했다. 

아주 오래 전이 아니라 최근까지도 말이다. 

그럼 여기서 질문. 탁자 위에서 하는 게임을 뭐라고 할까? 

탁자(테이블)+위(톱)니까 Tabletop이 답이다.


탁자 위의 RPG, 일본과 한국에서는 Table-Talk RPG라고 부르기도 한다. 

탁자 주위에 둘러앉아 대화하는 RPG라고 해석한 것인데, 어차피 줄이면 똑같은 TRPG다. 

이것이 무엇인지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참가자들이 종이와 펜 그리고 주사위 등의 아날로그적인 도구들을 가지고, 대화를 통해 자신이 담당한 캐릭터의 행동을 표현하면서 정해진 룰에 따라 이야기를 진행해가는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어째 떠오르는 게 있나? 어렸을 적 해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를 소꿉놀이가 원초적인 TRPG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TRPG의 핵심은 바로 Role-Playing이다. 소꿉장난의 이웃집 6세 소녀와 당신은 실제 아무 상관없는데 남편과 아내를 연기했다. 

종이컵에 담은 모래를 두고 맛있는 요리인 양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게임은 이렇게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연기하면서’ 진행된다. 

TRPG 정의에서 ‘대화를 통해’도 중요한 부분이다. 

어디까지나 상상력과 혓바닥만으로 게임을 펼치기 때문에 우리는 기사가 되어 용과 싸울 수도 있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주를 차버릴 수도 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Role이 흔히 역할로 번역되긴 하지만 실제 의미는 좀 다르다는 부분이다. 

흔히 역할이라고 하면 MMORPG의 탱커/딜러/힐러로 연상되는, 자신이 맡은 직업이나 행동양식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RPG에서 말하는 Role은 사실 역할보단 배역에 더 가깝다. 

즉 게임 내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이나 임무가 아니라, 자신이 담당한 캐릭터 그 자체를 연기한다고 봐야 원래 의미에 부합한다. 

상상 속의, 내가 절대 될 일이 없는 누군가를 연기하면서 정해진 규칙에 맞춰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것이 TRPG의 즐거움이며, 따라서 좋은 Role-Play의 기준 역시 “얼마나 본인이 연기하기로 정한 캐릭터의 모습에 합치하는가”로 정해진다. 

설령 그게 반윤리적인 범죄를 저지르거나, 분노 조절 장애로 남에게 싸움을 거는 식의 기분 나쁜 모습이라고 해도 말이다.


RPG란 장르의 근본 그 자체

RPG의 의미를 정확하게 짚고 넘어간 이 시점에서, 여전히 우리의 의문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지금 이게 수많은 명작 RPG들과 무슨 상관인데? 

그건 다시 TRPG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게 어떤 역사를 지니고 있는지부터 언급해야한다. 

던전드래곤: 던전&드래곤은 첫 판본 발매 후 46년이 지난 지금까지 현역이다.


역사적으로 의미를 지니는 최초의 TRPG는 1974년 발매된 <던전즈&드래곤즈>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게임은 ‘드래곤으로 대표되는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지하미궁을 탐험하는 판타지 세계의 탐험가"’란 콘셉트를 아날로그로 즐기는 작품이었다.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끈 이 작품에 매료된 사람들은 이걸 당시 발전하고 있던 컴퓨터로도 즐길 방법을 떠올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게임은 컴퓨터로 즐기는 RPG란 의미를 담아 Computer RPG, CRPG라고 불리게 되었다. 

<울티마>나 <위저드리> 등의 게임이 이런 흐름을 타고 발매된 초기 대표작이다. 

한동안 RPG는 TRPG와 CRPG로 구분되었지만 점점 컴퓨터를 플랫폼으로 삼는 게임들이 주류가 되면서 Computer의 C는 빼버리게 되었다. 

그러면 남는 것은 뭐다? 

RPG. 이게 바로, RPG가 각종 게임 장르로서 나타나게 된 간단한 배경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컴퓨터 게임의 RPG와 TRPG의 차이점 때문에 우리는 위화감을 느끼게 된다. 

디지털 게임에서의 Role은 역할을 뜻하는 쪽으로 흘러왔다. 

아처라면 뒤로 빠져서 활을 쏘고, 탱커라면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면서 몸빵하는 역할에만 충실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TRPG는 다르다

탁자 건너편 상대와 대화를 시작하기 전부터 각자의 머릿속에선 게임이 시작된다. 

자신이 연기할 캐릭터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TRPG의 재미는 무한한 상상력에서 나온다. 

캐릭터 구축이 큰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이름이나 성별, 외모 같은 MMORPG 식의 커스터마이징은 물론이고, 직업과 능력에 과거 배경이나 성격적 특징 등 아예 사람 한명을 만드는 수준을 요구하는 작품도 드물지 않은 편이니 말이다. 

대부분의 CRPG는 이 과정을 생략하고, 제작사들이 만든 캐릭터들을 플레이어가 조작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해나가는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대화를 통해 다양한 전개를 만끽할 수 있는 TRPG와 달리, CRPG는 사양과 용량의 한계로 제작사가 정해둔 한계선 내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게 되는 것도 큰 차이점이다. 

그렇게 하나하나 제한점이 생기다보니, 결국 이게 무슨 Role-Playing이야? 

같은 소리가 나오게 된다. 

그러다보니 컴퓨터 게임으로서의 RPG는, 역사적으로 이 장르가 TRPG에서 시작되었지만 플랫폼 특성에 맞춰 바뀐 것으로 이해해야 오해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컴퓨터 게임만큼 다양한 TRPG 작품들의 세계


RPG에 대해선 설명이 된 듯하니 TRPG로 돌아가서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보자. 

일반적으로 TRPG 작품은 대개 목표로 하는 게임성이 천명되고, 이를 위해 플레이어들이 참가하게 될 세계 설정, 게임 룰에서 지원하는 연기 가능한 캐릭터 세팅, 그리고 게임의 진행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세부적인 규칙들을 지원하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던전&드래곤>을 예로 들면, 먼저 위험한 던전을 탐험해 몬스터를 물리치고 금은보화를 획득하는 모험극을 목표로, 

⓵드래곤이 날아다니고 마법이 판치는 ‘반지의 제왕’식 판타지 세계 설정 

⓶전사, 마법사, 성직자 등 다양한 직업군과 종족 및 스킬들 

⓷서로의 행동이 충돌하거나 전투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성공/실패를 가릴지에 대한 규칙 등이 포함되어 있는 식이다. 

하지만 이건 그냥 하나의 예시일 뿐이고, 작품에 따라서는 아예 보드 게임처럼 모든 규칙이 정형화된 경우도 있으며, 반대로 모든 것이 참가자 마음과 말빨로 돌아가도록 자유로운 것들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유형의 작품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TRPG의 장점이기도 한데, <던전&드래곤> 이외에도 유명세가 있으면서, 한국에도 정식 번역되어 발매된 작품들을 몇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코스믹 호러로 잘 알려진 <러브크래프트>의 세계관에 내던져진 탐사자들이 될 수 있는 <크툴루의 부름>.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그대로 구현한 듯한 디스토피아 세계관의 부조리한 생활을 즐길 수 있는 <파라노이아>. 

다양한 확장/추가 자료를 통해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재현할 수 있는 <GURPS>. 

피에 대한 갈증과 인간성 사이에서 고뇌하는 뱀파이어의 이야기를 다룬 <월드 오브 다크니스:뱀파이어 더 마커레이드>. 

다양한 장르의 호러 작품의 주인공이 되어 구를 수 있는 플레이를 지원하는 인세인 등등. 

이외에도 여기에 전부 적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수백 수천 개의 작품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TRPG라는 틀 안에서 이들이 공유하고 하는 특징은 동일하다. 

모두, 평소라면 상상할 수 없는 다른 누군가가 되어 원래대로라면 경험할 수 없는 이야기를 즐기는 작품이라는 것.


해본 사람들은 계속 하게 되는 TRPG의 매력


TRPG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가지 해봤지만, 사실 TRPG는 실제로 플레이하기 매우 어려운 취미 중 하나로 꼽히곤 한다. 

왜냐하면 일단 사람을 모아야하고, 이들이 모두 룰북을 어느정도 숙지해야 하는데다가, 여유로운 시간대를 맞춰 제법 긴 시간을 함께 플레이해야 하고, 그것도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연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딱 봐도 쉽지 않아 보이는 조건이지만, 그럼에도 근 50년 넘게 이 장르가 지속된 이유는 명쾌하다. 

용량과 미리 작성된 코드 때문에 플레이에 제약을 받는 CRPG와 달리, TRPG는 상상력만 있으면 무궁무진한 자유도를 타인과 함께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빅뱅이론>이란 드라마에선 이렇게 표현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그래픽 칩을 사용해. 상상력.” 

기술의 발전에 따라 지금은 다양한 웹사이트를 통해 온라인으로도 즐길 수 있게 된 TRPG. RPG 장르의 원조인 이 장르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어몽어스: 역할 수행극이란 의미를 놓고 보면 TRPG는 이런 작품과도 일맥상통한다.

 

CPRG한계: 이런 순간에 “꺼져라! 사악한 마귀야!”라고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이 CRPG의 한계다.

 

피아스코: 즉흥적인 B급 영화 스토리를 즐기는 게 목표인 피아스코. 자유도가 극한에 이른다.

 

크투루: TRPG가 아니면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존재에게 세계가 멸망하는 경험을 언제 해보겠어?

 

ROLL20: ROLL20은 대표적인 온라인 TRPG 플랫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