큿코로데이즈

큿코로데이즈


클리셰만으로 하나의 게임을 만들 수 있다!

by 청익



최근 스팀발 에로게임이 부쩍 늘었다. 

늘기만 한 게 아니라 꽤 선전하는 추세다. 

예전의 유명작들을 이식하거나 리메이크하는 경우도 있지만 에로게임 시장 엔진 점유율이 키리키리에서 온라인 정품확인이 간편한 아르테미스/좀더 다양한 장르에 적용되기 좋은 유니티로 옮겨가며 스팀/DMM/DLsite 등 온라인 다운로드 상권이 부쩍 늘었고, 그 덕에 원가절감이 되며 중저가 볼륨 게임의 시장 이전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그중 스팀은 전 세계, 특히 오타쿠 감성 공유가 쉬운 중국/대만 시장을 공략하기도 좋아 많은 개발자가 뛰어들었다. 

지금 소개하는 큿코로데이즈 역시 그런 흐름을 타고 나온 게임 중 하나다.


‘클리셰’라 함은 대체로 일관되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경향을 뜻한다. 

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비주얼 노벨 계열에선 떼놓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고, ‘장르’ 구분이 사실상 클리셰 덩어리인 걸 생각해보면 당연할 수밖에 없다. 

이 게임은 제목부터 클리셰에서 따왔다. 

‘여기사가 에로틱한 상황에 처했을 때 99% 내뱉는 대사’라고 할 수 있는 ‘큿, 차라리 죽여라(くっ、殺せ)!’를 줄인 ‘큿코로(くっころ)’에다 일상물 에로게에 으레 달리는 제목인 ~days를 붙여서 ‘큿코로데이즈’가 된 거다. 

내용을 열어보면 한술 더 뜨는데, 아르바이트생이 집에 왔더니 침대 위에 듣도보도 못한 마법진이 펼쳐져 있고, 거기서 웬 여기사가 튀어나와서 주인공을 마왕군으로 오인한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첫 마디는 뻔하겠지? ‘큭, 죽여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익숙한 공간에 펼쳐진 마법진이나 낯선 미녀의 등장 모두 일본에서 몇 년 전에 지겨울 정도로 범람하던 ‘이세계 소환물’의 전형적이면서 아주 평범한 도입부다. 

물론 유행을 살짝 지나간 구성이기도 하고. 뒷부분의 일상 파트나 최종결전, 심지어 엔딩마저 전부다 왕도라면 왕도, 클리셰라면 클리셰라고 할 정도로 ‘독창성’을 찾아보긴 힘들다.

보통 이정도로 오리지널리티가 없으면 플레이해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플레이한 다음 새로운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하니 시간을 버렸다는 기분이 들기 쉽다. 

‘돈 벌기 참 쉽죠’하면서 약올리는 게임사의 호구가 된 것 같아서 썩 유쾌하지 않아지기도 한다. 

그런데 해괴하게도 이 게임이 아시아는 물론 서구에서도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똥겜에 대한 질타 여론도 안 들린다. 의아해서 일단 플레이해보기로 했다.


요즘 시대에 동인 RPG쯔꾸르 게임조차 1GB 넘는 게임이 종종 있고, 노벨계통은 1.5~3GB, 심하면 2~3DVD조차 심심찮게 보일 정도로 ‘볼륨의 홍수’시대라고 할 수 있다. 

헌데 이 게임, 나름 히로인 풀보이스인 데도 불구하고 730MB밖에 되질 않는다.

분명 캐릭터가 동영상처럼 움직이는 E-mote가 적용되고 풀보이스에 정상적인 플레이타임이라면 1.5GB는 잡아야 할 텐데, 용량을 보는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니나 다를까, 단일 히로인으로 3가지 엔딩만 지원하는 극단적인 작은 볼륨의 게임이었다. 

오프닝 엔딩 무비는 당연하다는 듯이 없었고, 애당초 보이스는 히로인 한 명 이외에 등장할 여지가 없었다. 

등장인물이 없었으니 당연히 보이스도 들어갈 구석이 없겠지! 문득 게임 제작사 miel의 최근 행보가 생각났다. 

아차, 거기도 300~500MB짜리 단발성 게임을 주구장창 내긴 했었지. 작품 전체를 꿰뚫는 단일 클리셰로 5시간 이내에 가볍게 완독 가능한 정도의 가벼운 볼륨, 하지만 철저하게 작품별로 속성을 압축하여 고객층을 확보하는 방식의 마케팅이라면, 큿코로데이즈의 방향에도 납득할 만하다. 

다만, miel의 게임은 그 압도적인 발매량에 비해 딱히 이렇게까지 화제를 모으진 않았다. 

그렇다면 이 게임의 숨은 매력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게 아닐까? 

진지하게 마음을 다잡고 플레이를 시작해보았다.

생각 외로 소프트웨어 측면에선 잘 만든 게임이다. 

스팀에서 판매하는 에로게는 스팀 측에서 뭔가 가이드라인이라도 내려주는 건지 거의 흡사한 Config 옵션을 가지며, 키 매핑이나 UI배치 역시 대부분 비슷한 탓에 게임 편의성은 어느 정도 보장이 되는 편이다.

E-mote를 사용했다는 점 외엔 개발 과정에서 특별히 어려움을 겪지도 않았을 것 같다. 

단촐한 만듦새라 딱히 눈에 띄는 버그도 없고, 선택지가 15개쯤 되지만 실질적인 분기는 주인공이 히로인을 따라 이세계로 가는가, 히로인이 주인공을 따라 이쪽 세계에 남는가, 배드엔딩으로 끝나는가의 3종류가 전부다. 

심지어 앞의 두 가지 엔딩은 최종 선택지에서만 갈라지고, 배드엔딩은 앞의 12개 선택지중 하나만 틀려도 배드엔딩 직행이므로 분기 공략이 어렵지도 않다. 

문제 난이도도 운전면허 필기시험마냥 ‘양심껏, 이상적인’ 답안을 고르면 그게 해피/트루엔딩 공통 답안지고, 게임 스타트부터 엔딩까지 모든 텍스트를 Ctrl 키로 스킵할 경우 대략 2분 안에 게임이 끝난다. 

실로 단순하기 그지없는 게임이다. 

사용 악곡 수도 총 10곡, 그 중 세 곡은 편곡 버전이니 실질적인 곡은 8개에 불과하고, 보컬도 들어가지 않는다.


스토리 자체는 생각했던 것만큼 절망적이진 않았다. 

왕도 만화가 매번 거기서 거기지만 꾸준히 팔려 나가는 이유가 ‘익숙한 맛이라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는 강점이 있듯, 정말 1시간 30분쯤 플레이하면서 어디 하나 불편하게 느낀 부분은 없었다. 

뻔한 두부에 뻔한 멸치볶음에 뻔한 콩자반이지만 밥상에 한꺼번에 올려놓으면 평범한 가정식이 되듯, 각 요소만 따지고 봤을 떈 이제 질릴 법도 하지만 모아놓으니 크게 불쾌감 없이 엔딩을 볼 정도로는 잘 엮은 스토리였다.


다만 문제는 1시간 30분. 저 시간이, 히로인 보이스를 일절 스킵하지 않고 모든 대사를 들은 플레이타임이다. 

플레이어 취향 따라 갈리지만 헤비한 게임 유저들은 에로씬의 보이스를 2/3이상 스킵하는 스타일로 플레이하는데, 이번 시험 과정에선 일절 스킵 없이 플레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총 풀레이타임이 1시간 30분 안에 정리가 되어버렸다. 

엔딩 3개를 모두 회수하고 나서 왜 이 게임이 화제가 된 건지 깨달았다. 

아, 특별히 잘 만들어서나 못 만들어서가 아니라, ‘안 만들어서’였구나 싶었다. 

스토리가 워낙에 짧다 보니 엔딩을 보고 나서도 ‘뭐, 벌써 끝났다고?’하는 느낌이었는데, 희한하게도 아쉬움은 남지 않았다. 

이미 사전에 약속된 클리셰를 잔뜩 집어넣어 플레이어가 적응하거나 감정이입하는데 걸릴 시간을 극단적으로 줄이고, 할 말만 짧게 1시간쯤 하고 끝내니 딱히 화가 나지도 않는다. 

아, 플레이 다 끝나고 스팀 구매이력 보면 화가 좀 날수도 있긴 하겠다. 길어야 2시간에 1동네치킨 수준이면 좀 과하게 고급진 게임 아닌가.

문제는 이게 의외로 많이 팔린 걸까? 

닌텐도 스위치로도 나왔다.

물론 전연령판 기준으로 자를 거 다 자르고 나오겠지만, ‘판을 키워도 괜찮을’ 정도로 재미를 봤다는 소린데... 발사의 전작인 Trouble days 등 모든 작품이 스위치/스팀 동시발매중인 걸 보면 확실히 팔리나본데, 정말 짧은 킬링타임용으로 나오는 게임이 많이 없어서 빈틈시장을 공략한 것인지, 영미권에서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에로게라서 팔리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가격만 빼놓고 본다면 딱히 나무랄 데는 없었다. 최근 게임은 플레이타임을 짧게 가는 추세다. 

큿코로데이즈는 그 중 독보적으로 짧은 게임이 아닐까 싶다.

극장판 애니메이션 한 편 보는 기분으로 가볍게 플레이한다고 치면 내용도 구성도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고, 스토리도 비록 매번 보던 물건이지만 오히려 이 정도로 뻔뻔하게 나오니까 호감이 갈 정도다. 

문제는 이 작품이 13,500원의 가치를 하느냐다. 극장판 애니 VOD 한편이 정말 비싸봐야 5천원 하는 걸 생각하면 좀 어이가 없는 가격이긴 하다.

스팀의 한 리뷰에서처럼 여기사물을 좋아하고, 움직이는 애니 캐릭터를 좋아한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겠지만, 둘 다 아니라면 굳이 구매할 만한 게임은 아니다. 

하지만 둘 중 하나라도 당신의 취향과 겹친다면, 그리고 정말 아무 이유 없이 시간을 때려죽이고 싶다면 한번 도전해도 썩 나쁘진 않겠다.

 

 이렇게 기절한 채로 마법진에서 튀어나오는 걸로 시작한다.


깨어나자마자 “큿, 죽여라!”를 외친다.


평소엔 엄격하지만 귀여운 걸 보면 좋아 죽는 설정도 뻔하다 못해 민망하다.


엔딩으론, 그녀를 따라가거나


함께 남으면 된다. 배드엔딩이 아니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