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전통의 CUBE사에서 전하는 내일의 이야기, 신과 같은 너에게

Kavin
11년 전통의 CUBE사에서 전하는 내일의 이야기, 

신과 같은 너에게



CUFFS/CUBE에서 3월 27일에 3년만에 신작을 내놓았다. 

매 작품마다 과하게 묵직하지 않은 분위기로, 하지만 항상 진지한 주제를 다루며 ‘대흥행’은 아니지만 꾸준한 팬층을 거느리며 11년째 명맥을 이어왔으며, 유명 일러스트레이터 カントク(칸토쿠)를 키워내고서 자주 기용해온 회사이기도 하다. 

꾸준한 불황과 함께 코로나 사태에 영향을 받아 신작이 가뭄에 콩나듯 하는 에로게 시장에서 간만에 메이저 메이커가 내놓은 게임 타이틀이란 점에서도 반갑기 그지없는 이번 신작에 ‘이세계마왕과 소환소녀의 노예마술’로 유명한 무라사키 유키야 외 두명의 라이터가 시나리오를 담당했다는 소식은 적지 않은 기대와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했으며, 집에 콕 처박혀 플레이하기엔 비주얼노벨만한 게임이 없기에 진지하게 플레이해보기로 했다.




시대에 맞는 소재


CUBE사는 대체로 ‘인간관계’에 대한 주제를 게임 테마로 잡아왔다. 

첫 작품인 ‘여름의 비’가 그랬고, 그다음 작품인 your diary나 비교적 최근작인 ‘마미야군네 5형제의 사정’도 그렇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관계성에 대해 고찰해보고 감정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대해야 할까’하는 화두를 항상 던져왔다. 

이번 작품에서는 ‘나날이 발전하는 인터넷 사회, 그 속에서 생겨난 다양한 개성에 대해 어떻게 대해야 할까’를 근간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해커, 버추얼 아이돌, AI 등 시대를 꿰뚫는 키워드로 각 메인히로인 별로 짧지만 무게있는 고찰을 가미한 탓에 스토리 몰입도는 좋은 편이다.

주인공 시로마에 카이토는 해킹을 취미로 하는 평범한 학생이다. 

해킹이라 함은 ‘보안 취약점을 찾아 돌파하는’ 과정을 이야기하며, 일반적으로 그 과정을 즐기는 사람을 해커, 결과로 얻어낸 권한으로 각종 정보를 탈취하거나 변조하는 등 ‘공격적인’ 행동을 취하는 사람을 크래커라 한다.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퍼즐을 푸는’ 감각으로 해킹을 즐기며, 이야기의 시작은 전 세계의 일상에 스며든 C-AI, 중앙AI를 해킹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인류가 달에 메인컴퓨터를 설치하고, 일상 속의 잡다한 판단과 관리를 맡기기 위해 개발한 AI로, 자율운전자동차에서부터 토스트기에까지 그야말로 폭넓은 곳에 활용되는 AI인만큼, 엄중한 물리적/소프트웨어적 보안 속에 둘러싸여 있으니 주인공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장난감’인 셈. 

그렇게 애를 써서 결국 장벽을 뚫고 C-AI를 장악한 주인공이 내린 명령은 ‘전 인류 중에 눈이 똘망똘망하고 거유에 내 어리광을 받아주고 나를 좋아해주는 여성은 존재하는가’였고, 해당 여성은 ‘0명’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AI에게마저 재확인당하고 만다. 

그 순간 해킹이 들켜 역추적당하게 되고, 주인공은 급하게 연결을 끊는다.

연결을 끊는 순간에 AI는 해당하는 인물이 없으니 명령을 수행하지 못했고, 대안책으로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첨단 로봇 생산라인을 가동하여 조건에 부합하는, 주인공의 취향에 딱 맞아떨어지는 외모와 성격의 로봇 ‘츠쿠요미’를 만들어 주인공 집에 찾아오고, 글자 그대로 ‘하늘에서 뜬금없이 떨어진’ 이상형에 주인공은 당황한다. 

그렇게 예상하지 못한 ‘동거’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현실에 여친이 없으니 여친을 연성해낸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생각보다 메인 테마는 묵직하다.

츠쿠요미 루트에서는 ‘인간과 AI의 상호신용’과 ‘로봇의 인간사회 속의 입지’를 다루며, 아사쿠라 키리카 루트에서는 ‘아이돌의 사생활 보호에 대한 선 긋기’와 ‘누구나 될 수 있는 버추얼 아이돌의 입지와 우리가 대할 자세’ 등을 다루고, 라나 루트에서는 ‘공익을 위한 개인정보를 포함한 각종 정보공개에 대한 저울질’이 녹아들어 있다. 


[남몰래 버추얼 아이돌 활동을 하고 있는 후배 아사쿠라 키리카. 활발해 보이지만 친구가 없다]


[후배 같은 외모의 선배 라나 리델하트. 취미겸 부업으로 탐정활동을 하고 있다]




게임적인 요소는 꽤나 아쉬운 편


소재는 하염없이 이야깃거리를 풀어낼 수 있는 소재에, 메인히로인 3명과 그에 엮인 서브히로인 3명이라는 작지는 않은 볼륨임에도 불구하고 총 플레이시간은 상당히 짧은 편이다. 

선택지는 많은데 정작 분기가 적은 편이라 스토리 총량은 공통루트+히로인루트를 합쳐 2.5인분 가량에 불과하고, 총 플레이시간은 분기별 세이브를 활용할 경우 10여시간이면 모두 회수가 가능한 정도다. 


[서브히로인 루트는 에로씬마저도 2인1세트다. 이러니 분량이 나올수가 있나]


CUBE에서도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탓인지, 막과 막 사이의 간격이 굉장히 짧다. 

대략 3~5분에 한번씩 아이캐치가 나올 정도로 짧게짧게 끊어져 있어 굉장히 밀도있는 시간으로 느껴지긴 하는데, 문제는 이 짧은 간격이 플레이의 피로도를 가중시킴과 함께 스토리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보통 비주얼노벨이 ‘몇 시간 앉아서 멍하게 글만 보고 있어도 시간가는줄 모르는’ 스타일이 흔한데, 이 경우엔 5분에 한번씩 시계를 쳐다보게 만들기에 몰입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게임 진행중에 수십번은 넘게 볼 화면. 그나마 배경이나 좌측 히로인이 중간중간 바뀌는게 다행]


사실 이러한 볼륨 부족은 클리어를 하고 나면 어느정도 이해가 되는 부분인데, 전반적으로 시나리오 라이터가 ‘실존하는 전문지식이 부족하거나 그러한 지식을 스토리에 접목시키기 까다로웠’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례로 주인공의 해킹에 대해 전문용어나 해킹 기술에 대한 세부적인 묘사는 대체로 생략되어있고, 츠쿠요미에 대한 설명에도 ‘기술적’인 설명은 대부분 생략되어있거나 암묵적으로 ‘창작물 상의 양해’를 구하는 느낌으로 어설픈 설정이 난무한다. 

다만 ‘고난이도 문제에 대한 도전심리’나 ‘해커의 크래커를 대하는 태도’ 등의 해커에 대한 심리적 이해도는 상당히 높은 편이라 ‘사실 알기는 하는데, 설정이 근미래다 보니 그 시간대에 현재의 스킬이 통용될 거 같진 않다’는 판단에 세부 묘사를 자제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현대 기술 중에 가장 진보의 속도가 빠른 IT업계이기에 더더욱 조심할 수 밖에 없었던 건 아닐까.

위에서 ‘분기가 적다’고는 했지만, 선택지는 그럭저럭 많은 편이다. 

문제는 그 선택지로 갈라지는 차분 텍스트가 기껏해야 대여섯줄 수준이라 사실상 일방통행에 가까운 전개이며, 한 지점에서 동시에 갈라져나가는 분기가 아니라 순차적으로 한명씩 갈라져나가는 구조다보니 히로인은 3명인데 2.5인분이 나오는 것이다. 

거기다 에로씬이 등장하는 선택지에 해당 히로인의 아이콘을 붙여놓는데, 그 선택지가 곧 해당 히로인 루트의 분기를 뜻하는지라 공략 없이도 100% 스토리+CG회수가 이루어진다.


[루트를 잘못 들지 않게 히로인이 하트까지 날려가며 알려준다]


다만 첫 플레이에는 이러한 스위치 ON/OFF가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는 데다, 특정 히로인 루트에 진입하더라도 한동안은 공통 루트 같은 분위기로 진행되기에 ‘내가 지금 단일히로인 루트에 진입을 한 건가’ 확신이 들지 않아 의외로 집중에 도움이 된다. 

다만 이 점은 2회차 플레이에서부터는 전체적인 구조가 눈에 들어와 버리기에 별 의미는 없다.

원화는 ‘변태왕자와 웃지 않는 고양이’ 등으로 유명한 칸토쿠가 담당했으며, 배경에는 전문 배경디자이너 Yish를 기용하여 캐릭터뿐만 아니라 눈부신 배경아트를 자랑하는 탓에 눈은 시종일관 즐겁다. 


[칸토쿠야 유명인사라 익숙하지만, Yish의 배경 아트워크는 정말 압도적이다. 게임중에 자주 안나와서 문제지]


다만 최근 경향이 스탠딩 일러스트가 대사중에도 2~3번가량 바뀌며 표정변화를 주는 경우가 많은데, 그게 적용되지 않은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게임 엔진이 kirikiri라서 해당 기능을 지원하지 않는 탓인 것 같은데, 볼륨이 길지 않다보니 굳이 그런 기능까지 구현하면서 몰입도를 높일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하지만 ‘근미래적 주제’를 다루는 와중에 상기한 부분 외에도 UI나 게임 설정 시스템, 이펙트 등은 전반적으로 구시대에 머물러 있다 보니 아쉬움이 배로 남는 건 어쩔 수가 없다.

CUFFs/CUBE는 대대로 오프닝이 활기찬 대신 게임 음악이 굉장히 소프트한데, 이번 작품 역시 전반적으로 사이버네틱한 SE나 신디를 채용하긴 했으나 분위기는 마치 극세사 수면바지 마냥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계통의 BGM이 많다. 

주제와는 동떨어지는 감이 있지만 게임 전개 자체가 극도로 빠르지는 않기에 그러한 분위기에 거부감이 들지는 않는다.




팬디스크는 기대하기 힘들겠지만


스토리가 열린 결말로 끝난 게 아니라서 이어지는 이야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치밀하게 짜여진 세계관이 아닌 탓에 해당 세계관으로 속편을 기대하기도 힘들고, 그나마 외전 격으로 후일담을 다뤄줄 수는 있겠지만, 기껏 썰 풀기 좋은 주제에 이렇게 좋은 캐릭터들을 가지고서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황급하게 이야기를 끝내버리는 탓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앞으로 한동안 이정도 호화 스태프로 구성된 게임을 만날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스산한 에로게 시장인지라 안타까움은 두 배로 남는데, CUBE에서 희망적인 소식이 들려오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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