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망치는 것들—알면서도 범하는 습관적 오류

관계를 망치는 것들

알면서도 범하는 습관적 오류


 연경과 헤어진 후 얼마간은 연경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화가 날 때가 있었다. 

 함부로 남의 인생을 망치는 사람이라고, 어디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주정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연경에 대해서라면 나와 아주 먼 사람이 되었다는 것과 그래서 우리는 서로 무관하다는 것이 전부다. 

 잘 살았으면 좋겠다.

 그냥 나는 모르게 잘 살았으면 한다. 

 뭐 그런 기분이랄까. 

 내가 떠올리는 연경은 과거의 연경이고, 확정적이며 이미 지나간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임현, 「그 개와 같은 말」 에서.


 사람에 대한 이야기, 즉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대화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참 긴밀하게 연결된 세상이다. 

 그 범위에 있어서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 우리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다. 

 사람들을 큰 범주로 나누는 게 가능할지라도 개개인은 저마다의 특별함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대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어려운 일이다. 

 상투적인 표현처럼, 누군가를 알게 된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알게 되는 것과도 같다. 

 삶을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만병통치약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각각의 관계에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처방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우리는 오늘도, 나와 다르면서도 같은 사람들로 인해 웃고 운다. 


 ‘사랑’에 관해서 확정적인 정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누구나 사랑에 관해서 한 마디씩은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디씩이 무엇인가? 사람 세 명만 모여도 천일야회에 버금가는 에피소드들이 쏟아진다. 

 누군가에게 있어서 사랑은 허상 같은 것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전부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랑 혹은 그 비슷한 것으로 인해서 괴로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연애에도 유능함을 따질 수 있다면 필자는 연애 불구자 정도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원나잇 스탠드의 귀재라는 뜻은 아니다.) 

 가장 길었던 연애는 2년, 그 안에 있었던 매일매일의 해프닝을 생각하면 결코 건강하다고 할 수 없고, 심지어는 그 사이에 상대방과 나 모두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으며, 그렇다고 제대로 헤어진 것도 아니었다—말하자면 타의 반, 자의 반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해서 타고난 싸움닭 기질이 충만해서 위태로운 관계를 즐기는 것도 아니다. 

 이왕 연애를 한다면 순탄했으면 좋겠고, 한때는 순애보적인 사랑을 꿈꾸기도 하였다. 

 내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들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공부 못하는 애들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공부를 해도 비효율적으로 하는 애들과 공부 하는 방법은 알지만 근성이 부족한 애들, 그리고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애들. 

 연애에 적용을 하면 나는 두 번째 케이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건전한 관계를 유지하는지는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혹은 못하는) 것이다. 도대체 왜? 

 내가 관계를 망치는 경우들을 곰곰이(사실 열심히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생각해보면 경우의 수는 크게 몇 가지로 나뉘었다. 

 첫 째는 몸, 둘째는 말, 셋째는 마음가짐이다. 


Out of sight, out of mind명분이고.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허울좋은 명분에 불과할 뿐이다.

 사실 아무리 가까이 사는 연인이라도—특히, 오래된 연인의 경우는--몸이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내가 해본 최장거리 연애는 대전과 서산, 감이 안 잡히시는 분들 을 위해 첨언하자면 132km 장거리이고 왕복 세 시간 정도 걸린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서산이면 운전을 하지 않는 이상 교통편이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상대방의 배려로 인해 우리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날 수 있었고, 사실은 그 이상 만나는 경우도 많았다. 

 주로는 그가 대전에 왔고, 그가 본가인 수원에 갈 때에는 내가 올라가고는 하였다. 

 조심해야 할 것은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사실이 ‘당연한 배려’로 직결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배려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는 연애가 시간 날 때 틈틈이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보다는 없는 시간을 만들어서 하는 것이다. 

 그나 그녀가 당신보다 시간이 많다는 사실은 그들이 당신이 허락할 때면 언제든지 응해야 하는 심심풀이 땅콩이라는 뜻이 아니다. 

 연인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라도, 즉 노력을 기울여서라도 몸을 가깝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이 너무 바빠서 한 주 꼬박 야근을 하고, 생리 주기가 겹쳐서 또 한 주를 연장하여 섹스를 하지 못했던 적이 있다. 

 좀처럼 스킨십을 보채지 않는 그였지만 그는 내가 일을 ‘좀 쉬어야’할 필요성에 대해서 농담처럼 언급하였다. 

 그러나 그 말이 농담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상대방에게 원하지 않는 스킨십을 강요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내가 여의치 않다고 해서 그를 독수공방 시키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이다. 

 나는 그가 직간접적으로 그의 욕구를 표현했을 때에야 그에게는 섹스가 필요하다는 것을—그리고 어쩌면 그 빈도가 많을수록 좋다는 것을—알게 되었다. 

 섹스가 여의치 않을 때 내가 찾은 타협점은 수음을 대신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그를 위한 이벤트를 만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였다. 



인간이 언어를 필요로 하는 이유

 인간과 다른 생물의 의사소통 방식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언어일 것이다. 

 물론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그들조차도 그들만의 소통 방식이 존재한다. 

 때때로 스킨십은 많은 것을 해결해주지만 언어는 그것이 해결해줄 수 없는 부분을 풀어주고는 한다. 

 남자들이라고 해서 육체적인 것에만 충실한 것은 아니다. 

 상대방에게 염증과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섹스가 어떻게 원활할 수 있겠는가? 

 연인 사이는 욕망의 배출구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나 언어로 야기된 문제는 언어로 푸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어차피 공적이지 않은 인간관계는 다 정서적으로 맺어진 것이 아닌가? 

 말은 곧 감정의 매개체이다.


 한때는 갈등이 생길 수 있는 화제거리에 대해서 회피했던 적이 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 다투는 것은 서로에게 고통을 야기하고, 표면적으로는 관계에 금이 가게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표출되지 못한 불만은 미해결의 상태로 굳어지게 되고 결국은 곪아 터지게 된다. 

 존중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한 갈등은 나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 가이고, 기본적으로 어떤 마음으로 그를 대하고 있는 가이다. 


결국은 태도의 문제

 사실 육체적인 것도, 언어적인 것도, 본질적으로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입장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관계에 있어서 갑이나 을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갑론을박이 팽배하다. 

 물론 완전히 ‘똑같다’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를 동등선상에 놓고 바라보려는 태도가 있고 없음의 차이는 크다. 

 나는 사소한 문제들로 그에게서 마음이 멀어지고 있다고 느낄 때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입장을 바라보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가 한 잘못을 그가 잘해줄 때의 모습으로 무마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의 태도를 비추어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