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사로잡는 소설 주인공

여자를 사로잡는

소설 주인공


이런 남자 어디 없을까? 

여자에게 매력적인 고전소설 속 남자 주인공 다섯 명을 살펴본다.

by 이정미

 

 현실은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다. 

 현실의 예측 불허함은 두려움을 심어주는 동시에 스릴을 제공한다. 

 아무리 잘 만든 작품일지라도 소설이나 영화의 서스펜스는 현실을 따라한 모사품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의 가상의 세계는 안정감을 준다. 

 픽션은 픽션, 허구는 허구일 뿐이다. 

 상상에 갇힌 이야기는 현실로 넘어오지 못한다. 

 사람들은 왜 가상의 인물에 열광하는가? 

 할리우드 영화에는 실질적인 삶이 결핍되어 있다. 

 인물이 처한 모든 환경은 그들의 캐릭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설정된 장치들에 불과하다. 

 당신은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단면에서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기는 하다.

 다정하고, 매력적이고 때로는 섹시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게 된다는 뜻이다. 

 평범한 이십 대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들이 매력을 느낄 만한 고전 소설 속 인물 다섯 명을 제시한다.



1. 집착남의 원조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

 왜 나를 경멸했지? 

 왜 당신 마음을 배반했어, 캐시? 

 나로선 위로할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없어. 

 당신에게는 그래 마땅해. 당신은 자기 마음을 죽인 거야. 

 그래. 나에게 입맞추고 울려면 울어도 좋아. 

 나의 입맞춤과 눈물을 빼앗으려면 빼앗아도 좋아. 

 그러면 당신은 더욱 시들 것이고, 자신을 저주하게 될 거야. 

 당신은 나를 사랑했어. 

 그려면서도 무슨 권리로 나를 버리고 간 거지? 무슨 권리로.

 

 여기 원조 집착남이 존재한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 등장하는 히스클리프는 워더링하이츠에 등장한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다.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어른인 언쇼 씨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줄 선물을 망가뜨리면서까지 훗날 히스클리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길거리의 아이를 집으로 들인다. 

 히스클리프는 남매 중 오빠인 힌들리의 학대를 받으며 성장하지만 그의 동생인 캐서린 하나만을 바라보며 워더링 하이츠에서 꿋꿋이 살아간다. 

 그들은 유년 시절을 함께하며 사랑의 감정을 키운다. 

 그러나 린튼 가문과의 결혼이라는 캐서린의 배반이 있은 후 히스클리프는 완전히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그는 단지 캐서린을 손에 얻기 위해(동시에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쟁취한다. 

 힌들리와의 도박으로 워더링 하이츠를 손에 넣고, 캐서린의 시누이인 이사벨라와 결혼한다. 

 결국 그는 캐서린이 죽은 후 린튼 가문까지 손에 넣고 만다. 

 그의 삶은 철저히 캐서린이라는 여자 한 명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쯤 되면 가장 나쁜 인물은 사실 캐서린이다.


2. 집착남과 순정남은 한 끗 차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베르테르

 내가 가진 것이 이렇게 많으나 그녀를 향한 그리움이 모든 것을 빼앗아가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녀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네.

 

 괴테라는 거장이 스물 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쓴 이 소설은 당시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센세이셔널한 작품이었다.

 주인공의 죽음을 모방하여 권총자살을 이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도 유명인의 모방자살을 ‘베르테르 효과’ 또는 ‘베르테르 신드롬’이라고 부른다.) 

 서한체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온통 사랑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베르테르와 히스클리프의 차이점은 그들의 선택한 자멸의 방식이 다르다는 데에서 온다. 

 베르테르는 젊은 변호사이다. (벌써 합격의 냄새가 나는가?) 

 그는 상속사건을 처리하기 위해서 어느 마을에 왔다가 로테라는 여자에게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로테는 이미 정혼자가 있는 상태였다. 

 실의에 빠진 그는 공사의 비서가 되어 먼 나라로 떠나지만 사교계의 인습에 반하는 행동을 하다가 파면되어 다시 귀국한다. 

 당연히 로테는 이미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고통은 이해 받지 못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결국 그는 권총자살을 감행한다. 

 참 지독한 순정이다. 

 그를 본받아 골키퍼가 있는 여자를 사랑할 필요는 없지만, 이렇게 한 명만 바라보는 태도, 그리고 그녀를 해칠 바에는 자멸을 택하는 방식은 너무도 순수하다. 

 어떻게 이 절절한 순정남을 미워할 수 있겠는가?


3. 원숙미라는 것은 이럴 때 쓰는 말

<깨끗하고 밝은 곳>의 나이 든 웨이터

 도대체 그가 두려워하는 게 무엇일까? 

 그것은 두려움도 공포도 아니야. 

 그것은 그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허무라는 거지.

 그것은 모두 허무였고, 인간도 한낱 허무에 지나지 않거든. 

 모든 것이 오직 허무뿐, 필요한 것은 밝은 불빛과 어떤 종류의 깨끗함과 질서야.

 

 앞의 두 소설이 비교적 친숙한 반면에(이름만 알아도 많이 아는 거지 뭐) 헤밍웨이의 <깨끗하고 밝은 곳>은 다소 낯선 소설일 수 있다. 

 이는 아주 짧은 단편 소설로, 사실 캐릭터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심지어는 인물의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다. 

 소설은 젊은 웨이터와 좀 더 나이든 웨이터가 혼자 술을 마시는 노인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시작부터 젊은 웨이터는 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신은 아내가 있기 때문에 빨리 집에 들어가고 싶은데 저 영감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둥, 노인이 자살에 성공했어야 한다고 말하는 둥 요즘관점에서 보면 유튜브에 올렸을 때 조회수 100만은 거뜬히 찍을 법한 말을 서슴지 않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노인을 이해하려고 하는 나이 든 바텐더의 모습에서는 원숙미가 뚝뚝 떨어진다. 

 그는 젊은 웨이터가 나간 후 허무에 대한 사색에 빠지는데, 이런 식의 가끔씩 비치는 진지한 삶의 태도는 그냥 ‘멋’ 그 자체이다. 

 별다른 플롯이 없을지라도 이 소설을 읽음으로써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4. 나한테는 흔들리는 플레이보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토마시

 “토마시, 당신 인생에서 내가 모든 악의 원인이야. 당신이 여기까지 온 것은 나 때문이야."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을 정도로 밑바닥까지 당신을 끌어내린 것이 바로 나야.”

 

 밀란 쿤데라의 수작 속 토마시는 플레이보이 그 자체이다. 

 그냥 바람둥이의 뜻을 토마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는 아주 못된 남자이다. 

 아들까지 저버린 채 ‘여자사냥’에만 몰두하는 토마시의 욕구는 원대한 것이다. 

 그는 삶의 무게로부터 벗어나 가벼워질 것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의 앞에 누구보다 순정파인 동시에 무겁게 살아가는 테레사가 나타난다. 

 테레사에게 있어서 토마시는 숙명이고, 필연이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동시에 여러 여자를 만나는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테레사를 사랑하고, 그녀의 고통에 동화되어 감에 따라 그는 점차 바뀌어 간다. 

 그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결국 그녀가 그를 둘러싼 수많은 가벼움들 속에서 애착을 느끼게 될 대상임을 이해한다. 

 여성들은 가끔 자신의 남자를 바꾸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특히 그가 나쁜 남자일 경우에는.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끌어당기지 못해 안달이다. 

 내 여자에게만 따뜻한 나쁜 남자의 정석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펼쳐 보자.


5. 독특한 세계관의 소유자

<데미안>의 데미안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유년시절, 헤세의 <데미안>은 감동을 넘어 충격을 안겨준 책이다. 

 우선은 중심인물인 데미안이 거의 사기캐릭터 급으로 멋있고, 멋있고, 또 멋있다. 

 독특한 자아를 가진 사람들은 그게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주변의 어텐션을 받고는 한다.

 특히 그것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모를 알쏭달쏭한 것일 경우에는 더욱 호기심을 유발시키기 마련이다. 

 헤세의 소설에 등장하는 데미안이 딱 그런 인물이다. 

 사실 데미안은 서술자인 싱클레어의 성장을 돕는 조력자 같은 인물로서 기능한다. 

 그는 익히 알려진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도둑의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하여 제시한다. 

 그가 가진 비판적 의식은 너무도 이상적이어서 아득한 동시에 첨예할 만큼 현실적이기도 하다. 

 적당한 사차원 기질이란 이 인물의 성정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