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세종대왕 - 당신은 누구시길래

세종대왕, 당신은 누구시길래


한글날을 맞아 어르신의 회로애락을 뒷조사 해봤다.

 

세종의 즐거움

세종대왕은 어릴 때부터 공부의 신이었다. 

그의 큰형인 양녕대군이 세자이던 시절, 아버지 태종에게 “동생 충녕대군(즉위 후 세종대왕) 좀 본받으라”고 꾸지람을 들었다. 

그때 양녕대군은 “제 동생은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요”라고 대답했다. 

세종대왕은 늘 책을 끼고 살아서, 동생이 아플 때에는 의학서적을 탐독해서 직접 탕약을 달여주기도 했다. (동생은 죽었다. 역시 약은 약사에게!)

 

세종대왕은 정사를 결정할 때 늘 신하들이 토론하게 했다. 

타당하다고 판단되는 의견이 나오면 개입해서 결정을 내렸는데, 아직 부족하다 싶으면 끝까지 토의를 이어가게 했다. 

세종대왕은 즉위 다음 해의 조정회의에서 공법(당시의 세법) 제정을 주제로 토론하도록 했다. 

신하들이 그럴싸하게 법을 만들었다 싶으면, 끼어들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논의는 늘 원점으로 돌아갔고, 보충과 보완, 수정이 계속 이루어졌다. 

그래서 토론을 시작한 지 25년 만인 세종 26년에야 공법이 제정되었다.


세종의 분노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려 하자, 중화의 한문을 두고 오랑케 글자를 만들어선 안 된다는 상소가 빗발쳤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쉽게 글자를 익혀, 누구라도 사람됨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면 좋은 세상이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하며 신하들을 설득했다. 

이때 정창손이 살짝 개기다가 아주 개작살이 났다. 

그는 “가르쳐서 알면 그게 백성이겠어요? 백성은 타고난 천성이 비루해서 가르친다고 될 게 아니에요”라고 딴지를 걸었다. 

세종대왕은 역대급으로 분노하며 소리를 질렀다. 

“백성을 교화해서 좋은 세상을 만들 것도 아닌데, 너는 뭐하러 나라의 녹을 먹느냐? 그따위라면 도둑 아니냐?”

 

세종대왕은 여러 질병을 달고 살았는데, 통풍에도 걸린 듯하다. 

통풍에는 안 좋은 음식만 많고 추천하는 음식은 거의 없는데, 수박이 예외적으로 좋은 축에 꼽힌다. 

그런데 세종 5년에 궁중의 내시가 임금이 드실 수박을 훔쳤다가 걸렸다. 

세종대왕은 대로해서 곤장 100대의 처결을 내렸다. 

엉덩이가 박살 난 내시는 귀양 테크트리도 탔다. 

2년 후에도 다른 내시가 교훈을 얻지 못하고 수박 서리에 도전했다가 체포됐다. 

2년 전 왕의 분노를 봤던 신하들은 참수형까지 주장했지만, 세종대왕은 사건을 좀 더 자세히 조사했다. 

그리고 수박이 무르익다 못해 상할 지경이었단 사실을 참작해서 내시를 살려줬다. 

물론 곤장형은 면제되지 않았다.


세종의 사랑

세종대왕의 본부인은 개국공신 심온의 딸인 소헌왕후 심씨다. 

건국공신들의 세력화를 경계한 태종은 심온에게도 억울한 역모를 뒤집어 씌워 사약을 먹였다. 

세종대왕은 아버지에게 용서를 청하는 대신 궁에서 춤을 추며 나 몰라라 했다. 

신하들이 심씨를 폐서인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에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속으론 미안했는지 즉위 후에는 심씨한테 무척 잘해줬다. 

세종대왕과 심씨 사이에선 문종, 세조,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 굵직한 왕자들을 포함, 자녀 10명이 태어났다.

 

심씨에겐 노비 출신 시녀 김씨가 있었다. 

세종8년, 30세의 어르신께선 본부인의 시녀인 김씨를 침소로 불렀다. 

21세였던 김씨는 1년 후 첫 아이를 낳은 이후 6남 2녀를 봤고, 후궁으론 최고 자리인 빈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소헌왕후 심씨는 신빈 김씨를 질투하지 않았다. 

막내아들을 낳았을 때에는 신빈 김씨에게 육아를 위탁했을 정도로 오히려 사이가 좋았다. 

세종대왕은 침대에서도 대왕이었던 거다.


세종과 음악

서양음악의 악보는 오선지다. 

우리나라의 전통 음악은 ‘정간보’라는 걸 사용하는데, 이걸 세종대왕이 직접 만들었다. 

그는 중국의 유가 사상을 흡수하면서도 우리 전통도 지키려고 했다. 궁중음악도 마찬가지다. 

고대 주나라의 아악을 받아들이면서도, 제사를 받는 조상들이 남의 음악을 들으면 좋아하시겠냐는 논리로 우리의 전통 음악인 향악을 섞도록 했다. 

그래서 나온 게 종묘제례악인데, 지금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종묘에서 구경할 수 있다.


중국의 송나라는 문화국가로 이름 높았다. 

송나라 휘종은 고려 예종에게 실로폰 비슷한 편경을 선물했다.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서 예종은 고려 음악이 쪽팔릴 지경이었다. 

고려 왕실은 송나라의 악기들을 귀하게 여기다가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 우물에 던져 숨겼다. 

한편 송나라도 이민족인 원나라에 멸망하면서 그들이 자랑하던 음악의 전통이 끊겨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조선 초에 송나라 악기들이 발견되었다. 

세종대왕은 중국보다 먼저 송나라식 오리지널 사운드를 완성하라고 명령했다. 

박연과 장영실 등이 10여 년간 연구를 거듭한 끝에 송나라식 사운드를 찾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세종대왕은 음의 미미한 차이를 다 짚어내면서 절대음감을 몇 번이나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