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STYLE욕망, 매혹, 혹은 그냥 단순한 이끌림에 관한 이야기들

2021-02-05

욕망매혹, 혹은 

그냥 단순한 이끌림에

관한 이야기들


그리고 은유란 선명하고 매혹적이지만, 때로는 그 아름다움이 우리를 미혹한다는 것을 잊지 마라. 

이를테면 네가 망쳐온 그 화분들은 결코 네가 얻게 될 생명과는 동가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천희란,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 에서.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아름다움 즉, 善(good)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우리는 좋은 것들에 대해서는 좀처럼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보다는 좀 더 시각적이고, 그래서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것들에 대하여 美를 논할 뿐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그것들이 단순한 감각에 의한 착각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매혹적인 것들과 그것만이 선사하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사랑한다.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사람들은 자주 외로움을 느끼고, 그러한 외로움을 충족하기 위해 타인을 통한 즐거움을 추구하고, 그러한 즐거움 속에서 자신의 존재나, 존재가 가 질 수 있는 의미를 발견하기도 한다. 

 타인에 대한 욕망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황홀함을 준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불완전하게 느껴진다. 

 같은 맥락으로 나르시시즘은 영원히 완성될 수 없는 사랑일 것이다. 

 나는 타인을 사랑하고 있는 상태가 좋고, 때로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한 소년이 자신의 입으로 당신을 발견했을 때, 색으로 채워지는 그 느낌을 느껴본 적 있으세요? 

 만일 몸이, 그 최상의 상태에서 몸을 향한 ‘갈망’일 뿐이라면 어쩌죠? 

 한때 비어 있던 경로들과, 우리를 서로에게 데려가는데 소요되는 몇 마일의 길들을 채우며, 오로지 되뱉어져 나오기 위해 심장으로 돌진하는 피, 왜 그 애를 직접 만졌을 때보다 손을 허공에 둔 채, 그 애에게 다가가는 동안 제 자신을 더 잘 느꼈던 걸까요?

 오션 브엉, 『지상에서 우리는 잠시 매혹적이다』 에서.


 일요일 오전은 오후에 출근을 해야 한다는 특수한 사정을 제외하면 여유를 부리기에 적당한 시간이다. 

 미세먼지 농도는 여느 때만큼이나 나빴다. 

 사람들은 전염병에 관해서 계속 이야기하였다. 

 매년 초가 되면 나도는 ‘종말론’을 포함하여 좋을 것이 없는 시국이기는 하다. 

 잠시도 햇볕이 들지 않는 우중충한 오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에 남아있는 미미한 감각들은 그 시간을 밝게 기억하게 만들었다.

 현—그가 굳이 자처해준 닉네임을 거부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임을 말하고 싶다—의 집을 나온 지 세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미묘한 열기와 긴장감에 휩싸인 몸을 달래기 위해 손가락을 아래로 뻗는다. 

 욕구를 해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동시에 그가 남겨두고 간 감각을 훼손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도덕적 의식이 해이한 인간이라고 해도 현재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은 예의일 것이다. 

 다른 사람을 상상하며 상대방과 섹스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히 지난 주 내내—다른 누군가와 몸을 섞을 때조차 잠시나마 그를 떠올렸다는 것이 나의 무례함을 증명하는 것 같아서 찝찝한 기분마저 든다—그에 대한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런 종류의 구체적인 이끌림이 낯설다. 


 사랑을 이루고 있는 요소에는 분명히 육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육욕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지. 

 구체적인 상대방에게 사랑, 혹은 ‘유사사랑’의 감정을 느낀 적은 많지만 구체적인 육욕을 느낀 적은 잘 없는 것 같다. 

 욕구만 남은 관계는 체념적인 것에 가까웠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면 욕구만 남은 것이 아니라 욕구해소만이 가능한 관계이겠지.) 

 사랑하기 때문에 특정한 상대방과 성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불특정 다수와 몸을 섞는 것은 흔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그리고 한정된 상대방에게 단지 ‘욕구’만을 느끼기 때문에 섹스를 하는 것은 조금 비약비약 이야기인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구체적인 상대방에게 분명한 욕구를 느끼고 있는 상황이잘 이해가 가지 않고, 낯선 상황에서 혼란을 느낀다. 


 욕구를 적절하게 통제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인류는 姓을 쾌락을 즐기기 위한 방식으로 발전시켜왔다. 

 대부분의 인간사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욕구라는 영역도 그렇게 다루기 쉬운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섹스에 한 없이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동시에 이는 가장 단순한 시각으로 비추어 질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사랑을 위한 불가침의 영역일 수도 있고(사실, 귀납적인 관점에서 보면 잘 믿기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악수나 게임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가치관의 문제에 대해서 가타부타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다만 그 행위의 보편성 만큼이나 다양한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오해를 가져올 수도 있는 행위이기는 한 것 같다.

 누군가는 섹스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써 사용한다. 

 내 이야기이다. 

 물론 백 퍼센트의 비율을 얘기할 수는 없다. 

 나도 인간이고, 성욕을 느끼고, 그것을 해소하고자 한다. 

 굳이 따지자면 전자의 이유에 칠 할을 주고자 한다. 

 즉 칠할의 경우는 파트너를 위해 기꺼이 할만한 행동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물론 막상 하면 또 싫거나 한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 자체에 그렇게 빈번하게 욕망을 느끼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와 나중 플러팅이라는 표현을 먼저 언급한 것은 내 쪽이다. (남녀가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섹스를 하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하기야 대부분의 이성적 끌림이 그렇듯이—나는 그냥 지인으로부터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그에게 순수한 관심이 갔다. 

 가벼운 마음으로 SNS를 구독하여 얕은 대화를 주고 받은 지도 많은 시간이 지난 후였다.

 갑자기 그가 연락을 해왔을 때, 오래 전에 알던 사람의 연락이 그러하듯이 놀라움과 반가운 마음이 함께 들었다. 

 그냥 그렇게 보게 되었을 뿐이다. 

 대부분의 낯선 사람들과의 대화가 그러하듯이 가벼운 이야깃거리를 부담 없이 할 수 있다는 점이, 어떠한 이야기도 마음에 담아둘 필요가 없다는 것이, 지금 당장의 시간 정도만 즐겁게 보내면 된다는 점이, 그런 가벼움들이 좋았다. 


 우연이라는 것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던 시간들이 있다. 

 나 자신의 특별함에 대하여 사춘기적인 감상을 가지고 그러한 특별함에 상응하는 사람을 찾고자 하는 치기. 

 물론 내 스펙트럼 안의 사람들은 사실 적당히 비슷하기 마련이었고, 그들과 나 사이에서 공통점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것들에 불과했다. 

 그가 꽂아둔 책들의 많은 부분이 나와 겹친다거나, 내가 좋아해왔던 사람들과 비슷한 취미와 전공을 가졌다는 점이 남다른 감상을 주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 같다. 


 감정적인 것들의 원인을 찾고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부조리하다. (직관적으로 말하면 뻘짓이다.) 

 단순히 누군가의 관계에 대해 언어적으로 분명하게 정립하지 못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끼는 것이 잘못은 아닐 것이다. 

 욕구와 같은 보다 원초적인 본능을 마주하는 것이 썩 친숙하지는 않지만 누군가의 정수에 온전히 집중한다는 것은 받아들이면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