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STYLE[LOVE]야한 속옷과 미니 원피스


야한 속옷과

 미니 원피스


감추는 것과 드러내는 것의 역

by 이정미


그녀는 커피를 다 마시고는 주머니에서 추파춥스를 꺼내 입에 물었다. 처음 몇 분 동안 그녀는 모든 정신을 사탕을 먹는 입에 집중한 것처럼 보였다. 눈이 사팔뜨기처럼 보일 정도로 사탕의 막대를 주시하고 있었다. 사탕을 먹는 여자를 그는 참으로 오랜만에 만났다. 껌을 씹는 여자를 그는 경멸했다. 껌을 씹는 일에는 아무런 상상력이 필요 없다. 끊임없이 입을 놀리지만 언제나 그 자리로 돌아올 뿐이다. 자신이 원하던 이미지는 저렇듯 오래도록 사탕을 먹는 여자의 모습이었음을 그는 깨달았다.

김영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에서.


개인적으로는, 이성으로서의 매력을 도무지 느낄 수 없는 남자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섹스를 못하는 남자(이 경우는 ‘개인적으로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될 거 같다.)이고, 다른 하나는 상상력이 없는 남자이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상상력은 (너무도 당연히!) 혼자만의 망상을 펼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는 은유를 이해하는 남자가 좋다. 보여주는 것과 가리는 것의 간극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하는 남자가 좋다. 더 나아가 그 자신 또한 그 은유를 적절하게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 좋다. 미디어의 화려한 이미지 속에서 등장하는 바나나, 막대사탕, 그리고 플레인 요거트는 가장 클리셰적인 비유이다. 섹스에 있어서 실체적인 오감의 만족이 중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야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상력이 없는 남자는 쉽게 질린다. 대부분의 평균적인 인간이 줄 수 있는 육체적인 만족에는 한계가 있다. 100% 이상의 수치는 물리적이지 않은 부분에서 온다.


가리는 것이 보여주는 것

여자들이 입는 옷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한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나는 흔히 ‘섹시하다’고 말하는 스타일을 좋아한다. 굳이 공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루스한 느낌을 주는 옷을 입으려고 한다. 그러나 타이트한 미니 스커트와 가슴이 파인 크롭 티셔츠처럼 ‘명백한 섹시함’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러한 옷들이 나쁘다거나 취향 X까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섹시함’이라는 이미지가 보다 원초적이고 자연스러운 스타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얇은 티셔츠 아래에 비치는 속옷을 입지 않은 가슴의 굴곡이라든가, 높게 묶어 올린 포니테일 아래로 드러나는 목덜미 같은 것은 ‘잘 꾸며진’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원초적인 감각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하다. 여성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탄탄한 복근과 어깨라인에서 드러나는 ‘보여주는’ 섹시함과 한 두 번 걷은 리넨 셔츠의 소매 아래로 드러나는 핏줄이 ‘은유하는’ 그것에는 차이가 있다. 나는 전자의 어필이 더욱 담백하고 그래서 더 착한 ‘섹스 어필’이라고 느낀다. 반대로 후자의 경우는 뻔뻔하다. 후자의 섹시함은 ‘보여주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말이다.

 

‘야한 속옷’의 의미

외적인 부분은 가장 직관적으로, 그리고 가장 빠르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다. 옷을 입는 방식을 포함하는 ‘패션’은 사람의 심리를 드러내고 그를 비추는 거울 같은 것이다. 옷은 한 사람에 대해서 말을 해주고,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담아낸다. 다수의 언더웨어 브랜드와 편집숍에서는 “웨딩 란제리”를 거의 하나의 카테고리처럼 취급하고는 한다. 신혼의 연인 사이에서 튀어야 할 육체적인 열정을 생각하면 그 카탈로그 안에서 다루어야 하는 속옷이 아주 “야해야”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웨딩’이라는 단어에 걸 맞는 순백의 청순한 디자인의 상품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당연히’ 아무도 이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사실 헤테로 섹슈얼 여자인 내 입장에서는 아무리 야한 디자인의 언더웨어를 보아도 직관적으로 ‘섹시함’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백색의 언더웨어와 슬립에서 섹시함을 느끼는 기재는 어렵지 않게 추론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예상치 못한 괴리에서 오는 ‘자극’이다. 우리는 기대하지 않은 불균형함의 조화에서 자극을 받는다. 이제는 일반명사처럼 사용되고 있는 ‘베이글’이라는 단어도 사람들의 이러한 심리를 보여준다.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순백색을 ‘순수함’과 연관을 짓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다수의 남성들에게서는 교제하는 여자들에게 있어서 크든 작든 어느 정도는 ‘성’을 가르치고 싶어하는 심리를 엿볼 수 있다. (너무 시대착오적인 발상인가?) 순수한 이미지는 이 미묘한 심리를 자극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성의 언더웨어 카테고리에서 또 하나 주목할만한 점은 ‘이벤트’ 카테고리이다. 요즘에는 남성용 ‘이벤트’ 의류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으나 편의상 나에게 더 친근한 여성 의류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겠다. 많은 이벤트 란제리들은 옷을 입고도 섹스가 가능하도록 디자인 되어 있다. 노출의 정도가 꼭 섹시함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오래된 연인처럼 심지어는 몸의 어느 부분에 점이 있는지 까지 알고 있는 사이에서는 단순히 ‘보여주는 것’이상의 ‘드러내지 않음’이 필요하다. ‘야한 속옷’은 연인들 간의 섹스에 대한 암묵적인 메시지로 기능하기도 한다. 욕구에 대한 신호이자 일종의 은유인 셈이다. 그런 종류의 옷들은 자기가 보았을 때 ‘예쁜 것’을 고르지 않는다.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철저하게 상대방을 위해서 고안된 옷이기 때문이다. (물론 결국에는 나한테도 소정의 이익이 돌아오기는 하지만.)


The more, the better?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처럼 보여서 한 번 자극을 맞보면 더 큰 자극을 찾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클래식한 것은 꾸준히 베스트로 칭해진다. 왜 그런 걸까? 가장 기본적이고 고전적인 것들은 그것만이 선사하는 오리지널리티를 가지고 있다. 물론 수치적인 만족감은 낮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잘 아는 것처럼 ‘클래식’은 그 평탄한 매력 때문에 질리지 않는다. ‘쌀’에 뚜렷하고 자극적인 맛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주식으로 섭취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이러한 특성 때문에 자극을 주는 다른 음식들과 적절하게 섞이기 마련이다. 이는 섹스에서도 적용되는 이야기인 것 같다. 새로운 상대방을 만났을 때, 색다른 체위를 시도했을 때, 그리고 즐거움을 가증시켜주는 도구를 사용했을 때, 재시도의 만족감은 처음의 느낌을 따라올 수가 없다. 자극을 주는 것들에 질렸기 때문에 더 큰 자극을 찾다 보면 언제인가 한계에 부딪히고 말 것이다. 엽기적인 SM플레이나 불법적인 루트로 향락을 즐기다가 결국은 사고가 나서 매스컴에 실리는 것이 자극을 추구하는 것의 한계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늘어진 관계에서 필요한 것은 더 드러내는 것--즉 명백한 방식의 더 큰 자극을 찾는 것이 아니라--조금쯤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닐까 싶다.


*크레이지 자이언트 2020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