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컴퓨터 특공대 <SSSS.그리드맨>


돌아온 컴퓨터 특공대 <SSSS.그리드맨>


괴수를 만드는 소녀는 무엇을 꿈꾸는가?

by 제로


지금 청소년기를 보내는, 혹은 과거에 보냈던 독자 여러분. 한번쯤 이런 생각해본 적 없는지 묻고 싶다. 

어딘가에서 괴수라도 나타나서 이 갑갑한 일상을, 저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을, 또 짜증나는 학교를 부숴버리진 않을까…하는 생각. 

사실 필자는 서른이 넘었는데도 이따금씩 그런 일탈을 꿈꾸곤 한다(편집장님 죄송합니다. 오해입니다). 

만약 자신에게 괴수를 만들어낼 능력이 있다면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1995년 SBS가 방영한 <컴퓨터 특공대>에 그런 인물이 한 명 등장한다. 

말콤 프링크라는 녀석인데, 컴퓨터 천재임에도 사회성이 떨어져 친구 하나 없고 학교도 거의 다니지 않는다. 

그의 유일한 낙은 직접 만든 바이러스로 디지털 월드를 파괴하고 나아가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 

뭐,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악당이다.


반면 <컴퓨터 특공대> 주인공 일행은 소위 말하는 ‘인싸’ 집단이다. 

팀 사무라이라는 교내 밴드를 운영하는 샘 콜린스, 드러머이자 럭비부 활동을 겸하는 탱커, 키보드를 치며 밴드의 홍일점이기도 한 시드니, 베이스 담당이며 유머 감각이 뛰어난 앰프까지. 

이들은 우연히 발견한 정의의 프로그램 써보(그리드맨)와 힘을 합쳐 디지털 월드에서 날뛰는 괴수, 즉 말콤의 바이러스에 대항한다. 어디까지나 싸움의 무대는 컴퓨터 내부인지라 부수적인 피해라 봐야 기계 오작동이나 정전 수준이지만 말이다. 

그만큼 <가면라이더>나 <파워레인저> 같은 여타 특촬물보다 하이틴 취향에 맞춘 작품으로 청소년이 감정 이입하며 즐기기 좋다. 

물론 1995년에 이걸 봤을 청소년이라면 지금쯤 필자처럼 배 나오고 머리 벗겨진 아저씨일 터. 세월 참 빠르다.

여기서 잠깐 족보를 정리하고 넘어가자. 

상술한 <컴퓨터 특공대>는 1994년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끈 <슈퍼휴먼 사무라이 사이버 스쿼드>의 국내 수입 명칭이다. 

이 <슈퍼휴먼 사무라이 사이버 스쿼드>는 <울트라맨> 시리즈로 유명한 일본 츠부라야 프로덕션의 1993년작 <전광초인 그리드맨> 미국 리메이크 버전이고. 

아무래도 미국과 일본 감성이 꽤 다른 탓에 작품 분위기도 차이가 나지만, 어쨌든 청소년들이 디지털 히어로가 되어 괴수화한 바이러스를 처치한다는 내용은 대동소이다. 

그러니까 <컴퓨터 특공대>만 봤더라도 <전광초인 그리드맨>을 대충 안다고 할 수 있는 셈. 

이런 이야기를 굳이 장황하게 한 이유는, 오늘 소개할 작품이 <전광초인 그리드맨> 25주년 기념 TV 애니메이션 <SSSS.그리드맨>이기 때문이다.




더는 케케묵은 영웅 대 괴수가 아니다


일본의 평화로운 마을 츠츠지다이에 사는 고등학교 1학년 히비키 유타는 어느 날 눈을 뜨고 자신이 기억상실에 걸렸음을 깨닫는다. 

친구도 가족도 심지어 그간 살던 집주소조차 떠오르지 않는 혼란스러운 상황. 

뭔가 크게 어긋난듯한 기분 속에서 유타는 우연히 낡은 컴퓨터 화면에 비치는 하이퍼 에이전트 그리드맨과 만난다. 

“사명을 완수하라”는 그리드맨의 외침에 유타는 크게 당황하면서도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고민하며 학급 친구인 우츠미 쇼, 타카라다 릿카, 

신죠 아카네의 도움을 받아 하루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그 평온한 나날은 갑작스러운 괴수의 습격으로 너무나도 간단히 짓밟히고. 

이제 압도적인 질량과 화력으로 마을을 유린하는 괴수를 상대로 유일한 희망은 유타 자신이 그리드맨과 일체화하여 맞서 싸우는 것뿐이다.


25년간 먼지 쌓인 케케묵은 특촬물을 이제와 애니메이션화한다니 어떨까 싶겠지만 의외로 <SSSS.그리드맨>은 굉장히 세련된 작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에서도 역동적인 연출과 색감으로 손꼽히는 스튜디오 트리거의 야심작이니까. 

주요 등장인물은 물론이거니와 그리드맨과 괴수 디자인도 일신했으며 특히 2D와 3D를 적절히 섞은 액션신이 대호평이다. 

전체 12화라는 비교적 짧은 분량임에도 너무 서두르는 감 없이 고른 호흡으로 이야기를 전개해간다. 

원작 <전광초인 그리드맨>이 매우 알기 쉬운 권선징악의 표본이었다면 <SSSS.그리드맨>은 그 틀을 역으로 비틀었다. 

컨셉은 1993년작에서 빌려왔지만 감성만큼은 2018년산이다. 

따라서 이건 그렇게 올곧은 작품이 아니다. 어쩔 수 없다. 

오늘날의 히어로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SSSS.그리드맨>의 표면적인 주인공은 유타와 릿카, 우츠미 세 친구다. 

하지만 조금만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실질적인 이야기의 축이 신죠 아카네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신죠 아카네는 유타의 옆자리에 앉은 여학생으로 <컴퓨터 특공대>로 치면 말콤 프링크와 같은 역할이다. 

겉으로는 명랑한 모범생을 연기하지만 속으로는 조금만 수틀려도 상대를 제거하려고 괴수를 보내는 잔혹한 악녀. 

한편으로 그것이 설령 잘못된 방법이라도 행복하고자 발버둥 치며 진심 어린 우정을 갈구하는 가여운 소녀이기도 하다. 

25년 전 <컴퓨터 특공대>는 말콤 프링크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냥 방구석에서 컴퓨터나 만지는 루저로 취급했다. 

<SSSS.그리드맨>은 다르다. 히어로가 아닌 괴수를 만드는 자의 마음을 조명한다.


애당초 이상하지 않은가. 

<컴퓨터 특공대>에서 팀 사무라이와 말콤 프링크는 모두 현실의 인간이었다. 

그들은 써보(그리드맨)와 괴수라는 형태로 디지털 월드에서 대리전을 치룰 뿐이다. 

반면 <SSSS.그리드맨> 속 괴수는 정말로 마을을 파괴하며 사람들을 헤친다. 

디지털 월드로 들어간다는 핵심 컨셉을 무시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츠츠지다이가 바로 디지털 월드인 것이다. 

현실에서 외면당한 외톨이 신죠 아카네가 구축한 가상의 도피처, 그리고 그곳을 침범해온 하이퍼 에이전트 그리드맨이란 이레귤러. 

디지털 월드의 주민 즉 NPC인 유타, 릿카, 우츠미에게 있어 신죠 아카네는 대등한 존재가 아닌 무자비한 창조주에 가깝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을 타도하고자 싸우지 않는다. 

그녀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려는 것이다.




영웅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말해준다면


트리거는 과거 가이낙스의 전성기를 구가한 베테랑 일부가 독립하여 세운 애니메이션 제작사다. 

전설적인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만든 그 가이낙스 말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마냥 올곧고 절대로 실패하는 법이 없는 히어로에게 열광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적인 고민을 하고 관계에 어려움을 겪으며 갈등하는 입체적인 인물에 더 친밀함을 느낀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그 시초는 아니겠으나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가이낙스는 거대 로봇물의 주인공이 꼭 당찬 열혈남아일 필요는 없다며 우유부단하고 심약한 이카리 신지를 긍정해줬다. 

<SSSS.그리드맨>도 그와 다르지 않다. 

물론 오늘날에도 교내 밴드를 하는 ‘인싸’ 주인공이 더 좋은 이들이 있겠지만, 솔직히 필자는 예나 지금이나 말콤 프링크에 더 가까운 사람이다.


물론 따지고 보면 말콤 프링크는 진짜 루저이고 신죠 아카네도 이래저래 몹쓸 짓을 많이 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던가. 

그녀의 잘못을 단죄하는 것과 그녀의 상처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별개다. 

실제로 <SSSS.그리드맨>에서 신죠 아카네는 무조건 용서되고 구원받지 않는다. 

아메미야 아키라 감독은 그녀가 시청자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했음을 밝힌 바 있다. 

나쁜 건 나쁘다. 

우린 다 조금씩 나쁜 짓을 하며 살아간다. 

그렇다고 괴수를 쓰러트리는 히어로처럼 단칼에 베어버리는 것은 너무하다. 

12화 끝자락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신죠 아카네는 현실로 돌아간다. 

이 마지막 장면은 실사로 촬영했다. 본작이 특촬물 <전광초인 그리드맨> 25주년 기념작임을 생각하면 퍽 어울리는 연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