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점에서 다시 봐야할 <2020 우주의 원더키디>

이 시점에서 다시 봐야할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


그래서 2020년인데 외계 미소녀 여자친구는 어디 있나요

by 제로


뜬금없는 소리지만, 우리가 외계인 여자친구를 사귀려면 몇 년이나 더 기다려야 할까? 

당장 인류의 외우주 진출만 고려해도 향후 100년안에는 어려울 듯하다. 

그때쯤이면 필자는 연애는 고사하고 진즉 고독사하고 말았을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기술 발전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한 감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60년생 정도면 십수년 사이 논밭이 빌딩숲으로 바뀌는 걸 직접 목격한 세대다. 

몇 년만 더 있으면 자동차가 날아다니고 달에도 별장을 짖는다는 소리가 꽤 그럴싸하게 들렸으리라.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되는 국산 명작 <2020 우주의 원더키디> 또한 그러한 상상력의 산물이었다. 

1989년 당시 수많은 소년소녀가 매주 금요일 저녁, KBS 2TV를 통해 이 만화를 보며 우주에 대한 꿈과 열정을 키웠다. 

필자의 경우는 어디까지나 외계 미소녀 예나를 향한 로망이었지만… 

세월이 흘러 2020년이 되었건만 예나는커녕 인간 여자친구도 없다.


전설처럼 회자되는 국산 명작 애니메이션

본 코너에서도 <영혼기병 라젠카> 등을 다룬 바 있지만, 사실 그 시절 국산 애니메이션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 못하다. 

잘 포장해서 ‘가능성을 보여줬다’지 이래저래 문제가 많았다. 

그런데 <2020 우주의 원더키디>만큼은 이례적으로 대다수 3040세대가 ‘우리나라에서 나오기 힘든 명작’이라 기억한다. 

과연 정말로 그럴까. 

마침 2020년을 기념하여 KBS가 재방영해준 덕분에 다시금 정주행본 결과, 역시나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2020 우주의 원더키디>는 ‘더 늦기 전에 세계에 도전하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자’는 모토 아래 드림팀에 가까운 제작진이 모인 야심작이었다. 

SF라는 소재 선택이나 서구적인 작화, 주요 인물의 이름이 모두 영어인 이유도 처음부터 해외 진출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당시에는 흔하던 뱅크신(한 번 그린 장면을 재활용)도 거의 없고 서사와 연출도 공들인 티가 난다.


요즘이야 아동용 애니메이션이라면 ‘야채 많이 먹고 건강히 뛰놀며 부모님 말씀 잘 듣자’같은 다소 유치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2020 우주의 원더키디>는 달랐다. 

나이가 들어 다시 보니 진지하고 어둑한 분위기와 이런 걸 애들한테 보여줬다고? 

싶은 장면이 꽤 많아 놀라울 정도. 

그렇다고 엄한 성인물까진 아니며 아동뿐 아니라 청소년층까지 함께 즐길만한 내용으로 구성됐다. 

약 13화에 걸친 줄거리를 축약하면 ‘지구소년 아이캔의 아빠 찾아 삼만리’ 정도가 될 텐데, 군더더기 없는 편집으로 시종일관 밀도 높은 전개를 이어간다. 

개성적으로 디자인된 여러 등장인물도 저마다 비중이 확실하고 특히 우주선부터 괴수 로봇까지 다종다양한 메카닉은 일본 애니메이션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볼거리다.

물론 그래봐야 80년대 작품이므로 요즘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든 답답한 행동거지와 이따금씩 흐트러지는 작화가 거슬리긴 한다.


바주카 든 지구소년, 외계 미소녀를 만나다


그럼 <2020 우주의 원더키디>를 조금 더 깊이 살펴보자. 

우주진출이 본격화된 2020년, 지구로부터 머나먼 성계에서 미지의 행성이 발견된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곳으로 향한 우주선은 너도나도 조난을 당하고 급기야 중요한 임무를 수행 중이던 독수리호도 같은 운명에 처하고 만다. 

이에 우주개발기구는 최정예 요원으로 구성된 구조대와 함께 갈라티카호를 파견하는데, 여기에 독수리호 선장의 아들 아이캔이 몰래 탑승하며 대모험의 막이 오른다. 

불과 열세 살밖에 안 된 소년의 등장에 다들 당황하지만 그렇다고 이제와 지구로 회항할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아이캔을 태우고 문제의 행성에 다다른 갈라티카호는 무언가 인위적인 폭발과 중력 변화로 인해 거의 추락하다시피 착륙한다. 

조난된 독수리호를 구하러 왔다가 자신들도 조난을 당한 셈이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구조대 일행은 외계 행성을 수색하기 시작한다.


반신반의하며 추락지점을 벗어나던 구조대 일행이 발견한 것은 놀랍게도 거대한 분지 중앙에 자리잡은 최첨단 성. 

이곳에선 조난당한 우주선 부품을 활용하여 공룡이나 해파리, 킹콩(진짜 이름이 킹콩이다) 로봇이 제조되고 있었다. 

심지어 성을 지배하는 사악한 AI는 <드래곤 퀘스트>라도 감명 깊게 즐겼는지 스스로 데몬 마왕이라 칭하질 않나. 

여기에는 좀 복잡한 사정이 있는데, 오래전 신천지를 찾아 지구를 떠난 천재 과학자 헨리 경이 이 행성에 먼저 도착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도와줄 남매 AI를 만들었으나 양심을 프로그래밍하지 않은 탓에 뒤통수를 맞고 쓸쓸히 죽어갔다. 

이후 남매 AI 중 누나는 마라 대마왕, 동생은 데몬 마왕이 되어 행성 원주민과 조난당한 지구인을 노예로 부려왔다는 모양. 

양심이 배제된 기술 발전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경고하는 부분인데 1989년보다 2020년에 더 유효한 교훈이라 재미있다.

여차저차 데몬 마왕과 마주친 구조대는 나름 잘 싸우는 듯하다 전원 생포되고 아이캔만 간신히 탈출한다. 

1~2화만 보면 성인 요원들이 상당히 유능하고 아이캔은 아빠만 찾는 철부지로 보일 수 있는데, 실상은 아이캔과 친구 로봇인 코보트 말고는 전부 병풍이나 다름없다. 

이 시점부터 모든 활약이란 활약은 아이캔이 다하고 무능한 어른들은 붙잡히고 탈출하기를 반복하는 신세. 

분명 지구에서 평범하게 자란 소년이라면서 바주카 하나로 로봇 군단을 죄다 박살내고 다닌다. 

거기다 데몬 마왕을 피해 숨어있던 원주민 사이에서 외계 미소녀 예나를 찾아내 꼬시기까지 하니, 열세 살 나이로 힘과 사랑을 모두 쟁취하여 인생의 승리자가 된 아이캔. 

친구라며 지구에서 데려온 다람쥐를 예나가 좋아하자 냉큼 줘버리며 “난 또 잡으면 돼!”하는 뻔뻔함이 굉장하다. 

그렇구나. 친구는 막 줄 수 있고, 또 잡으면 되는 거구나. 역시 미소녀가 최고다.


데몬 마왕을 상대하는 1~7화까지가 <스타트랙>처럼 미지와의 조우를 표현했다면 마라 대마왕이 나오는 8~13화는 본격 스페이스 오페라라 할 수 있다. 

여성형 AI인 마라 대마왕은 한 외계 왕국을 점령하여 다스리는 중인데, 허당끼 넘치는 데몬 마왕과 남매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완이 좋은 편이다. 

여기서부터 저항군을 이끄는 박산 왕자와 배신자 비비라 같이 새로운 인물이 대거 등장하며 예나의 정체가 공주로 밝혀지는 등 여러 이야기가 진전된다. 

물론 우리의 지구 구조대는 아이캔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무능의 극치. 

그간 애타게 찾아 헤맨 아빠가 세뇌되어 아이캔의 목숨을 노리는가 하면 겨우 다시 만난 엄마를 인질삼아 예나를 유인하는 등 동심파괴가 빈번히 일어나기도 한다. 

특히 최후의 순간 개심한 비비라가 마라 대마왕에게 자살 특공을 감행하는 장면은 아동용 애니메이션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비장미가 흐른다.



이제는 서른이 넘었을 소년소녀들, 파이팅

그 시절 <2020 우주의 원더키디>는 우리를 미지로의 모험으로 이끌었다. 

아이캔을 통해 당찬 의지와 용기, 가족을 향한 사랑과 헌신, 미소녀를 꼬시려면 친구까지 내줘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악독한 데몬 마왕과 마라 대마왕은 도의적 책임을 등한시한 과학 문명이 어떻게 타락할 수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비록 실제 2020년의 필자는 여전히 지구 한 구석에 붙박여 살지만 아무렴 어떤가. 

원래 SF란 그런 장르다.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와 우려를 담아 이야기를 만들고 거기서 진짜 교훈을 얻는 것. 

앞으로 30년 후 <블레이드 러너 2049> 같은 미래가 펼쳐질까? 

60년 뒤에는 <사이버펑크 2077>처럼 세계가 변할까? 

그건 중요치 않다. SF는 미래를 예측하려는 학술 논문이 아니다. 

SF의 목적은 여러분에게 영감을 주는 것이다. 

이제는 서른이 넘었을 소년소녀들이 <2020 우주의 원더키디>에게 받은 영감을 기억해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