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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고의 스파이 케임브리지 5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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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IANT 작성일2019-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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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Y, SPYING

20세기 최고의 스파이 케임브리지 5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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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매클린은 조금은 긴장하고 있었다. 면접관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캐물을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마음속엔 그 모범답안도 준비돼 있었다. 하지만 본심을 얼마나 잘 숨길 수 있을까, 그게 관건이었다.
면접이 시작됐다. 이런저런 잡다한 질문 끝에 한 면접관이 핵심을 찌르고 들어왔다.
“자네는 대학시절 공산주의 활동을 하지 않았나? 학생 때야 공산주의에 물들 수도 있다고 생각하네. 지금은 어떤가? 여전히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할 해답이라고 생각하나?”
매클린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후 천천히 대답했다.
“맞습니다. 저는 대학에 다닐 때는 공산주의자였습니다. 얼마 동안 저는 정말로 공산주의의 이상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저 혼자만이 아닙니다. 많은 학생이 그랬죠. 지금도 아직 완전히 단절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이미 저 자신은 분명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제 공산주의는 아닙니다.”
면접관들은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그의 솔직함에 큰 점수를 줬다. 하지만, 매클린은 뼛속까지 공산주의자였다. 거기다 소련의 첩자이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면접관들을 감쪽같이 속이고 영국 외무부 직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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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재원 도널드 매클린은 영국 상류사회 출신이었다. 아버지 매클린 경은 변호사 출신 정치인으로 램지 맥도널드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정치인이자 관료로 늘 바빴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살갑게 대하지 못했다. 아버지에 대한 매클린의 감정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기성체제에 대한 반항심으로 이어졌다.
매클린이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니던 1930년대는 세계적인 대공황의 시대였다. 사회는 혼란했고 자본주의는 완벽하게 무너진 것처럼 보였다. 기왕에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누어져 있던 영국 사회의 양극화는 더욱 심화했다. 젊은이들은 그 부조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고민하는 그들에게 공산주의가 희망으로 다가왔다.
매클린도 공산주의에서 답을 찾았다. 그리고 20세기 최대의 고정간첩으로 불리는 ‘케임브리지 5인방(Cambridge five)’의 일원이 됐고, 훗날 한반도 분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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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6 요원이 된 소련 스파이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5명의 소련 스파이. 가이 버제스, 킴 필비, 앤서니 블런트, 도널드 매클린, 케른 크로스는 대학 시절 각각 친구 또는 연인으로 엮여 공산주의자가 됐다. 그들은 모두 공산주의가 사회를 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하나의 신념으로 소련의 스파이가 된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판세와 전후 세계 재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대활약을 펼친다. 007처럼 총을 들고 적진에 침투하는 활약을 펼치지는 않았다. 대신 비밀정보가 모이는 길목에 자리 잡았다. 그들은 명실상부한 20세기 최고의 스파이였다.
케임브리지 5인방의 정신적 지주가 된 이가 같은 대학 경제학 교수 모리스 도브라이다. 그는 영국 공산당에 입당하고 당원증을 받은 최초의 영국 지식인 가운데 하나다. 당시 시대 상황을 고민하던 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자가 됐다.
케임브리지 5인방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무렵 일제히 영국 정보기관이나 외무부 등에 입사했다. 소련 정보기관의 적극적인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그들은 종주국 소련에 협조하는 것이야말로 공산주의 세계를 만드는 데 필요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소련 정보기관은 그들의 신념을 영리하게 이용했다.
먼저, 가이 버제스는 대학 졸업 후 대학 동창 빅터 로스차일드의 소개로 그 가문의 비서가 됐다. 로스차일드가는 영국 상류층에 막강한 인맥을 갖고 있는 가문이었다. 버제스는 그 가문의 비서라는 자리를 활용해 영국 해외 정보부 MI6 간부들에게 접근했다. 그들 중 훗날 MI6 부장이 된 인물이 있었고 버제스는 1938년 그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MI6에 들어갈 수 있었다.
킴 필비는 1939년 MI6에 입사했다. MI6 정보5과 간부 밸런타인 비비언이 킴 필비의 아버지 해리 필비의 옛 동료였다. 그가 킴 필비의 후견인이 되었다. 입사 후 킴 필비는 바로 MI5의 문서고에서 일하는 아가씨와 사귀기 시작했다. 그녀를 통헤 필버는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는 영국 스파이들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앤서니 블런트도 버제스처럼 친구 로스차일드를 이용했다. 그 가문을 통해 영국 국내정보부 MI5 간부들을 소개받았다. 그리고 결국엔 MI5 입사에 성공했다.
도널드 매클린은 앞 서 썼던 것처럼 자신이 공산주의자임을 숨기고 1935년 외무부에 입사했다. 물론 아버지의 도움도 없지 않았다. 케른크로스는 대학 졸업 후 외무부에 들어갔지만, 얼마 후 재무부로 옮겼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의 스파이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기밀 정보들은 모두 이들의 손을 거쳤다. 그 정보들은 그대로 소련에 보고됐다.
앤서니 블런트가 MI5에 입사한 후 처음 받은 임무는 소련 스파이들을 미행하고 감시하는 기법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는 MI5 요원들의 실제로 업무수행 과정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했다. 그리고 가장 합리적인 방안을 고안했다. MI5 고위층은 그의 방안을 마음에 들어 했고 공식 프로토콜로 채택했는데 문제는 이 내용이 소련 정보부에도 그대로 보고됐다는 것. 소련 스파이들은 MI5의 추적과 감시를 어렵지 않게 따돌릴 수 있게 됐다.
소련에 넘어간 정보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블런트는 영국 정보기관들의 공작 일정표와 해외 주재 스파이들의 완전한 명단까지도 모두 소련에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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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클린, 한반도 분단의 계기를 만들다




케임브리지 5인방의 다른 멤버들도 각자 자기 자리에서 맡은 소임을 다했다. 물론 소련 스파이로서. 그들 중 도널드 매클린은 한반도 분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1944년 매클린은 워싱턴 주재 영국대사관 1등 서기관으로 부임했다. 2차대전 후 영국과 미국의 전후정책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였다. 매클린은 극비문서들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다. 이때 매클린의 활동이 한국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쳤다. 소련이 김일성을 사주해 남침하게 한 데는 매클린의 정보 보고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1948년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B-29 폭격기를 유럽에 배치했다. 소련의 팽창정책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트루먼은 이를 위해 폭격기들이 원자폭탄을 탑재한 것처럼 보이도록 위장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충분한 원자폭탄을 갖고 있지 못했는데 매클린은 이런 사실을 소련에 보고했다. 트루먼의 위장전략을 알아챈 스탈린은 동구권 공산화를 거침없이 진행했다. 이어 김일성의 남침을 사주하기에 이른다.
6·25 전쟁 때도 매클린의 활약은 눈부셨다. 당시 그는 영국 외무부 미국과장이었다. 매클린은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전쟁을 제한전으로 치르기로 했다는 것, 핵무기는 사용하지는 않는다는 것, 만주를 침공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는 등의 기밀을 알아내 소련에 보고했다. 소련으로부터 이 정보를 얻은 중국은 자신 있게 6.25 전쟁에 참전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한반도의 통일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이처럼 (소련에게는) 눈부신 활약을 하면서 절대 잡히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케임브리지 5인방을 잡아낸 것은 미국의 ‘베노나 프로젝트’라는 거대한 감청 시스템이었다. 가장 먼저 꼬리를 밟힌 것은 매클린. 위기를 느낀 매클린과 버제스는 1951년 5월 소련으로 탈출했다. 킴 필비도 MI6에서 축출됐다. 그는 MI5의 조사를 받았지만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그 후 1963년 1월 소련으로 망명했다. 앤서니 블런트와 존 케른크로스는 형량 협상을 통해 혐의를 인정하는 대신 처벌을 면했다.
소련은 그동안 자기들을 위해 헌신했던 매클린, 버제스, 필비 등을 나름 배려했다. 하지만 그들의 여생이 행복하지는 않았다. 소련 정부는 좋은 집과 적지 않은 재산을 주었지만 그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는 없었다. 가족들이 영국에서 이주해 왔지만 필비는 아내와 이혼했다. 매클린과 버제스는 폭음 끝에 타향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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