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X

가볍게, 악수하듯이—나는 가벼운 관계들이 좋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GIANT 작성일2019-08-12

본문

2a41e673557f5b0851fd2077d1ef4c90_1565594154_8836.png




가볍게, 악수하듯이나는 가벼운 관계들이 좋다.


그거 알아요? 섹스에 대해서 이야기한 남녀는 섹스를 하게 될 확률이 훨씬 높아진대요.” 지금 이남자가 던지는 말은 설마 플러팅(flirting)인가? 잘 모르겠지만, 지금 이 발언은 방금 전까지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남녀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오갈만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한 사이는 그렇지 않은 사이보다 친한 사이이니까 그럴 가능성이 높은 것은 아닐까요?” 당신과 나는 방금 전까지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한 남녀는 그렇고 그럴 확률이 높으니, 우리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라는 것을 말한 셈이 되잖아요? 라고 되물을 수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정말이지 남자들이 던지는 말은 대담할 때가 많다.  

플러팅, 내가 알고 있는 한국의 문화에서는 오히려 성희롱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 같다. 플러팅과 일대일로 대응하는 명사는 우리말에 아직 없다. 언어는 사고방식을 반영하고, 사고방식은 언어를 반영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아직 플러팅을 국내적인 정서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사전에서는 “flirt”“to play at courtship(장난 삼아 구애를 하는 것); to talk with teasing affection, to insinuate sexual attraction in a playful way(성적인 이끌림을 장난스러운 방식으로 암시하여 놀리는 듯한 애정을 보이는 것)” 이라고 정의를 하고 있는데, 서양의 문화에서는 대화에서의 예의와도 같이 치부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플러팅에서 비롯된 건전한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으니 지금 이 사람은 나와 섹스를 하고 싶다는 암시를 하고 있거나 그냥 나를 무시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전자든 후자든 뭐라 말하기 어려운 애매한 기분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떠한 종류의 노골적인 발언들. “제가 XX씨와 섹스를 하는 상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그 이후에 우리가 더 이어나갈 수 있는 건전한 종류의 관계가 무너질까 두렵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네요.”

그는 나에게 섹스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글쓰기조깅하기따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은 좀처럼 하지 않으면서 꼭 섹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 하는지에 관해서는 쉽게 묻는다. 물론 글쓰기조깅하기같은 행위에 특정한 가치관을 가지는 인간이 드물기는 하겠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왜들 그렇게 그것에 집착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아니, 집착을 하는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그걸 꼭 나한테 드러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 남녀간에 오가는 섹스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친해지자는 가장 노골적인 지표로 작용한다. 순전히 섹스에 대한 현재의 생각을 가감 없이 표현하자면 당장 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동시에 굳이 해야 한다면 좀 잘생기고 몸 좋은 사람과 하고 싶은 것이다. 만약 그것에 대해 보다 본질적인 가치관을 묻는 것이라면 상대방에 따라 그 무게가 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의 두 가지는 듣기에 따라 신경질적인 대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적당히 내가 가지고 있는(그리고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생각만을) 이야기하고 되물었다. “그럼 XX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저도 그렇게 다르지 않아요. 상대방에 따라서 가볍다면 한없이 가볍고, 악수를 하듯이 가볍게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무겁다면 한없이 무거워질 수 있는, 정말 사랑의 정수 같은 것이 될 수도 있죠. 그런데 XX씨는 그 중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2a41e673557f5b0851fd2077d1ef4c90_1565594154_9779.png


 

삶에서 성공한 연애가 없다는 것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는 것항상 그 연애에서 을의 관계였다는 것그러한 연애들에 지쳐 이전처럼 마음을 쏟고 싶지는 않다는 것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사랑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그와 내가 공유하고 있는 종류의 동질감은 지긋지긋한 종류의 것이었고치유되기 보다는 송두리째 도려내야 함이 분명한 종류의 것이었고그 도려내는 행위는 아주 분명하게 폭력적이고 명시적인 것이었다그러한 상황이 선사하는 무력감과 나약함은 서로가 서로를 원한다고혹은 사랑한다고 착각하게 만들기에 적합한 것이었다그가 오 년을 채우지 못하고 헤어진 전 애인은 그를 만나는 동시에 계속 다른 사람들을 만나왔고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두 사람을 만나야만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고사랑을 믿지 못한다고세상에 배신하지 않는 것은 오직 섹스밖에 없다고내가 알지 못하는 그녀는 말하였다설령 그녀가 제 아무리 대단한 폴리아모리라고 할지라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는 판단은 어렵지 않게 내릴 수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그녀는 사랑을 알게 해준’ 사람이었다는 것이 안타깝기는 했다자신도 그렇게 사랑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는 그의 말이 전혀 진실성 없게 들리지는 않았다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의 기구한 연애사를 위로하다가 섹스를 하게 되는 뻔한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녀의 가치관에도 어렵지 않게 수긍할 수 있었으나나는 섹스 또한’ 배신하고야 만다고 생각한다물론 쾌락이야 배신하지 않고, “몸정이야 존재하겠지만, ‘섹스파트너는 배신한다어차피 인간사 다 믿지 못할 일들 투성이이고, ‘믿지 못할 일들에서 섹스를 배제한다는 것은 정말로 섹스를 믿어서라기보다는 섹스에 집착을 하다는 뜻이겠지매 순간 보이는 갈등을 외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내가 조금만 밀면 금방 넘어올 것 같은 남자를 구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그의 말들에서 추론해보건대 분명 그는 밀면 넘어올 것 같은 사람이었다그런데 앞으로 어떤 식으로 존재할지 모르는 앞으로의 관계’ 따위를 염려하며 거의 두려워하고 있기까지 하는 사람을 어떻게 밀 수 있겠는가무엇보다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작 섹스 정도에 눈이 멀어서 생각과 가치관이 맞는 사람과의 관계를 망쳐버리고 싶지는 않았다이성 간의 관계에 있어서의 정수는 육체적인 관계라고 믿었던 시간들이 있다그러나 육체적인 관계 끝에 남는 것들은 모두 추악한 것들뿐이었다정말 악수를 하듯 가볍게 섹스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러한 상념들을 떠보기라도 하듯이 더욱 난감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만약에 자게 된다면요다음에 만날 때 또 자야 하는 걸까요?” “꼭 그러라는 법은 없지 않을까요저는 예상하는 일을 포기했어요.” “저는 제가 부담을 드릴까 두려워요만약 XX씨가 저와 한 번 자게 되면 다음에도 또 섹스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닐지 고민하실까봐그래서 저를 만나는 것에 부담을 느끼실까 두려워요.” 물론통계적으로 보면한 번 섹스를 했던 사람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만날 때마다 섹스를 하게 되기는 하였다그가 지금까지 한 말들을 바탕으로 그가 원하는 것을 추론해보면 나와 섹스는 한 번쯤 하고는 싶지만그렇다고 섹스파트너라는 미명하에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지는 않고그렇다고 연애를 하자는 것은 더더욱 아닌 것 같았다말은 쉽지만 그런 식으로 가볍고 편안한 관계가 가능할 것인가육체와 정신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 아니고몸을 섞다 보면 어떠한 종류의 딴 생각이 들지 모르는 일 아닌가?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일어날 수 있기에 일어난다는 생각을 하면 그 무엇도 이상하지 않았다섹스가 다소 특별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것이 뭔가를 하면서도 그 뭔가를 하는 것이 뭔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들 가운데에서도 그런 생각을 때로 가장 심하게 들게 하는 것뿐이라는 것이었다.

정영문『어떤 작위의 세계』 에서.

꼭 애인친구파트너 같은 범주 안에 넣어둘 수 있는 관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따라서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생각하면 사실 그 무엇도 이상할 것이 없을지도 모르겠다그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악수를 하듯이 가볍게 섹스를 하고 다시 원래의 건전한(?)’ 관계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섹스라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혹은 그가 생각하는 무게에 걸 맞는 정도의 의미만을 부여한다면 굳이 윤리나정당성 같은 것을 걸고 넘어지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가벼워졌으면 좋겠다

 


Instagram#크레이지자이언트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