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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프랑스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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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IANT 작성일2019-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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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레옹, 프랑스를 만들다

 

그러니까 그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던 거군!이제 폭군이 되겠군!”

나폴레옹이 기어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베토벤은 이렇게 탄식했다. 그리고는 그에게 바치는 헌사를 적어넣었던 교향곡의 표지를 찢어버렸다. 베토벤이 다시 쓴 표지의 헌사는 <위대한 이에 대한 추억>이었다. 이 작품은 <영웅교향곡>이란 제목으로 발표됐다.

베토벤은 프랑스 대혁명을 승리로 이끈 제1통령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존경해 마지않았다. 나폴레옹이 유럽의 개혁과 변화를 주도했다는 데 그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영감으로 쓴 작품이 <영웅교향곡>이었고 베토벤은 이를 나폴레옹에게 헌정할 참이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은 베토벤의 예언처럼 독재자가 됐고 <영웅교향곡>은 한때는 위대했던 한 남자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으로 남았다.

프랑스인들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들에게 나폴레옹은 여전히 국가의 기틀을 세운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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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만든 영웅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프랑스 대혁명이 결과한 영웅이다그리고 베토벤의 예언처럼 혁명의 결실을 짓밟은 독재자이기도 하다프랑스 대혁명의 빛과 그림자 모두를 나폴레옹은 안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은 1789 7 14일부터 1794 7 28일에 걸쳐 일어난 시민혁명이다전 국민이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자기를 확립하고 평등한 권리를 보유하기 위하여 일어선 혁명인 것이다.

당시 프랑스에는 혁명의 토양이 마련돼 있었다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는 루이 14(재위 1643~1715집권기에 세력을 떨치다 루이 15(재위 1715~1774)와 루이 16(재위 1774~1792)의 집권기에 걸쳐 점차 힘을 잃었다이 시기에 상업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부르주아 계급이 새로운 세력으로 떠올랐다.

볼테르와 샤를 드 몽테스키외장 자크 루소 등 지식인들이 계몽주의를 확산시켰다귀족과 승려 등의 특권층에 대한 피지배 평민계층의 비판의식이 높아지고 부패한 왕실에 대한 시민의 불만이 고조됐다.

1789 7 14일 파리 시민군이 정치범 수용소인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사건을 시작으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7 16일 파리시 자치정부가 수립됐고 8 26일 인권선언이 선포됐다그리고 1793 1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하고부르봉 왕조를 무너뜨린 뒤 공화국을 세웠다이 혁명은 세계 모든 나라 특히프랑스 주변의 유럽 제국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합법적으로 즉위한 국왕이 혁명정부에 의해 목이 잘리는 사태가 빚어지자 유럽 열강이 뭉쳤다함께 프랑스를 공격할 명분과 이해관계를 모두 갖추게 된 것이다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프랑스 대혁명의 바람이 자국에 미칠 영향이었다.

그 결과 1793년부터 1815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국왕 살해범들에게 철퇴를 내리고 혁명을 싹을 짓밟으며프랑스의 야심을 억누르려는’ 목적 아래 뭉친 대프랑스 동맹군이 결성된다.

프랑스 내부에는 혁명 승리의 에너지가 넘쳐흘렀다동맹국들의 움직임에 평화 협상보다는 전쟁으로 맞섰다그 중심에 나폴레옹이 있었다시대가 영웅을 만든다평화의 시대였다면 나폴레옹은 그저 평범한 군인으로 인생을 끝냈을지도 모른다.

나폴레옹은 1769년에 코르시카섬의 아작시오에서 지방 귀족 샤를 보나파르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코르시카는 본디 이탈리아 땅이었는데 나폴레옹이 태어나기 1년 전 제노바가 프랑스에 팔아치워 프랑스 땅이 된 섬이었다그래서 프랑스의 지배에 반대하는 독립운동이 계속해서 벌어졌고,

나폴레옹도 소년 시절에는 독립운동가들을 존경해마지 않았다하지만 코르시카의 독립투사가 되지는 않았다대신 프랑스의 사관생도가 됐다사관학교 성적이 특별히 월등한 것은 아니었다다만 수학과 역사만은 뛰어났다. 1785, 16세의 그는 포병장교로 임명됐다수학의 재능이 그를 그 길로 이끈 셈이다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4년 전이었다.

나폴레옹은 23세 때 프랑스 대혁명을 맞았다그리고 1793 9월 대프랑스 동맹군과 쿨롱에서 첫 전투를 치른다당시 그의 계급은 포병 대위하지만 전략적인 안목이 뛰어났다.

그는 프랑스군의 포대가 효과적 사격이 불가능한 위치에 있음을 한눈에 알아채고 즉각 고치도록 했다그리고 총사령관을 제치고 전투를 주도해 적군을 완벽하게 제압했다.

이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전쟁 영웅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나폴레옹의 신화는 1796~1797년의 이탈리아 원정, 1798~1799년의 이집트 원정을 통해 점점 더 빛을 발했다나폴레옹의 국민적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반면 공화정의 평판은 혁명 이후 줄곧 내리막이었다정치의 중심이 국민 영웅 나폴레옹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정부는 나폴레옹에게 이집트 원정을 맡겼다정치에서 멀리 떼어놓겠다는 속셈이었는데그게 독이 됐다프랑스군이 라인강 전선에서 이탈리아군에 밀리고 정부는 위기라는 소식을 전해 들은 나폴레옹은 비밀리에 파리에 돌아왔다그리고 1799 11 18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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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광은 마흔 번의 전쟁 승리가 아니라 내가 만든 법전이다

 

프랑스 국민은 나폴레옹의 등장에 환호했다그들은 거리에 뛰쳐나와 공화국 만세나폴레옹 만세!”로 화답했다나폴레옹은 집정부의 지도자들을 위선자와 사기꾼들이라고 비난하고 공화국이 위험에서 벗어나지는 순간 나는 권력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그리고 스스로 절대 권력인 제1통령의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804년 12월 황제 자리에 오른 것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가 탄생했다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이뤄낸 공화제라는 결과물은 그렇게 사라졌다.

그런데도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이 영웅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절대 권력을 가지고 프랑스 사회의 대변혁을 추구했기 때문이다나폴레옹은 프랑스 대혁명 후 도덕군사 정치적으로 패닉 상태에 빠진 프랑스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의 법체계는 나폴레옹 독재 시대에 확립됐다그는 나의 영광은 마흔 번의 전쟁 승리가 아니라 내가 만든 법전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법과 제도의 정비에 열심이었다위원회를 구성해 대혁명의 원칙성문법과 관습법에서 보존해야 할 부분들을 하나의 문헌으로 작성했다모두 102회 열린 법률회의에 나폴레옹은 57회 이상 참석했다그때 그는 전쟁터에 전쟁을 치르는 중이어서 시간을 내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이른바 나폴레옹 법전이라 불리는 프랑스 민법전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나폴레옹은 평생 코르시카인의 기질인 거칢·솔직함을 잃지 않고 살았다그것이 농민 출신 사병들과 시민들의 신뢰를 얻은 힘이기도 했다통치자로서는 광대한 구상력끝없는 현실 파악의 지적 능력감상성 없는 행동력이 그의 매력이었다이런 그의 개성이 보나파르티슴이라는 나폴레옹만의 정치방식이 확립했다.

나폴레옹은 황제에 즉위한 후 1805년 12월 아우스터리츠전투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군에 승리했다이로써 프랑스는 전 유럽을 제패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812년 러시아원정에 실패하면서 나폴레옹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1814년 3월 영국·러시아·프러시아·오스트리아군에 의해 파리를 점령당한 후 엘바섬으로 유배된다이듬해 1815년 3월 다시 파리에 돌아와 권토중래를 꿈꿨으나 6월 워털루전투에서 패함으로써 물거품이 됐다대서양의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배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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