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RI, My Dear Moments

ATRI

My Dear Moments


노벨계에 놓치지 말아야 할 신작이 등장했다!

by 청익 


마쿠라 + 프런트윙?


6월에는 대형 게임 회사의 신작들이 특이할 정도로 많이 쏟아졌다. Key사의 <서머포케츠(SummerPocket)> 확장팩, LOSE의 <마이테츠> 완결편 등 굵직굵직한 볼륨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고, 7월 이후에도 발매 예정이 잡힌 작품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이런 와중에 눈에 쏙 들어오는 작품이 하나 있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기획, 제작회사로 유명한 애니플렉스(Aniplex)가 기존 게임사 몇 군데를 붙잡고 진행한 프로젝트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오늘 소개할 ATRI이다.

맞다. 마쿠라(枕)와 프런트윙(Frontwing)의 작풍은 워낙 다르다. 그래서 이들의 조합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선뜻 연상하긴 쉽지 않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음악과 아트 관련 교류를 꾸준히 이어왔다. <원더풀 에브리데이(素晴らしき日々)>를 포함한 여러 결과물도 나왔다. 그런 까닭인지 이번 <ATRI, My Dear Moments>는 두 개의 회사가 공동 작업으로 완성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깔끔한 완성도를 보인다. 음악이나 아트, 게임 프로그래밍 등 여러 분야에서 다년간 축적된 기술이 제대로 발휘되어 2만원대 게임이라고 믿기 힘든 구성을 갖추고 있다. 물론 에로 비주얼노벨 게임이 아니라는 특성에 힘입은 점도 있다. 에로 씬에 총력투구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만큼의 재원을 다른 여러 곳에 돌릴 수 있었을 거다. 그렇다고 에로 씬이 빠진 만큼 볼륨이 심각하게 줄어들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이번 프로젝트를 주도한 곳이 애니플렉스라는 사실도 충격적이다. 애니플렉스는 그동안 노벨게임을 제작하던 곳이 아닌데도 꽤 오랜 준비를 해 온 것처럼 수준 높은 번역을 제공한다. (영어/중국어/일본어의 3개국어를 지원한다.) 한국어가 없는 건 아쉽지만 번역에 대해선 이 정도면 만족할 수 있다. 스토리와 음악은 프런트윙, 아트는 마쿠라에서 담당했는데... 사실 그 구분이 크게 의미가 없는 느낌이다.


새롭지는 않아도 흥미롭다


전반적으로 ‘매우 새로운’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 ‘다리에 장애가 있는 주인공이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면서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구도는 <이 넓은 하늘에 날개를 펴고, 크루즈 사인(この大空に、翼をひろげて)>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인공생명체의 자아와 감정에 대한 고뇌 같은 건 마쿠라나 쁘띠케로큐에서 자주 다루던 ‘인외’ 설정의 게임들에서 곧잘 찾아볼 수 있었다. 다만 이번 작품은 기존 게임들과 몇 가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주인공이 모든 사건의 중심인물이며, 비록 어려서 다리를 사고로 잃었지만 그걸 빼면 완전 잘났다(머리: 손에 꼽히는 수재 집안: 몇 대째 이어지는 과학자 집안의 외동 외모: 설명이 필요없이 매우매우 잘났다)! 인간이 아니라는 설정은 비슷하지만 요괴 등 기존의 초생명체에서 벗어난 휴머노이드라는 점에서 차이는 분명히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게임 속 구성원들은 대부분 청춘활극 한가운데에 서있는 나이대의 인물들인데도 다들 각자의 상처와 절망을 안고 있다. 세계관이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가깝기 때문이다. (<취성의 가르간티아>처럼 지구온난화로 인해 세계의 대부분이 물에 잠겨버렸다는 설정이다.) 무작정 밝고 활기찬 분위기에서 탈피한 것도 게임에 색다른 맛을 부여한다.

또한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비자발적인 성장’이라는 키워드는 끝맛이 쌉싸름한 성장드라마를 본 듯한 기분에 빠지게 한다. <여름의 비>나 <이 넓은 하늘에 날개를 펴고> 등으로 대표되는 프런트윙의 콘노 아스타 스타일이라기보단 마쿠라의 스카지 디렉터가 즐겨 쓰는 스토리이기에 ‘철저한 분업’이 아니라 ‘잘 협업이 이루어져’ 만들어진 게임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콘노 아스타는 예전에 마쿠라에서 발매한 <해바라기의 교회와 긴 여름방학>의 시나리오를 맡은 적이 있다. 어쩌면 그 당시의 경험이 이번 게임 분위기에 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르겠다.


높은 밀도가 수준을 높인다


이번엔 협업인데도, 게임에는 두 회사의 특성이 하나로 버무려지지 않고 둘 다 그대로 살아있다. 이건 마치 3대째 장사하는 돼지국밥과, 마찬가지로 맛집리스트에 등록된 식당의 어죽을 같이 먹는 기분이다. 뭔 소리인고 하니, 보통 노벨게임에선 스토리의 완급을 주고 루즈한 부분이 있어야 하는데 이 작품은 플레이타임 10여 시간동안 그런 구간이 거의 없다는 거다. 일직선으로 큰 분기 없이 3가지 엔딩 루트를 타는데, 텍스트의 80~90%가 갈등과 고뇌와 복선으로 점철되어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텍스트 하나하나, 씬 전환 하나하나, 심지어 스틸컷 구석의 차분 하나하나마저 복선으로 활용되는 수준이라 쉴 틈이 없다.

가장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 케로Q의 <원더풀 에브리데이(素晴らしき日々)>인데, 이 작품도 플레이하는 동안 뭐 하나 쉽게 넘길 만한 텍스트가 없어 하루 반나절 밤새면서 하다 지쳐 나가떨어진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물론 복선 회수의 간격이 극단적으로 멀리 떨어져있진 않은 점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대부분의 복선이 10~15분 이내에 회수되는 탓에 웬만큼 둔한 사람도 ‘어, 이거 아까 어디서 본 거 같은데?’하고 되짚게 만들다 보니 10여 시간 플레이하고 나서 한 사흘 날밤을 샌 것 같은 피로를 느끼게 된다. 감정적인 피로보다는 단기기억을 끌어내는 두뇌의 피로가 심하고, 그런 부분을 조절하기 위해 약 플레이타임 45분 내외로 챕터를 나누어 놓은 듯하다. 초반 노멀 엔딩까진 저 45분 구간화가 정말 잘 되어 있는데,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45분 안에 압축되어 옴니버스 구성인가 착각이 들 정도다.

제작사의 특색은 스태프 구성에 따라 확연하게 드러난다. 마쿠라가 손을 댄 아트(시각) 파트는 철저하게 스카지의 감성을 반영하고 있고, 스토리의 일상파트에는 캐릭터를 유난히 줌인시켜 부각하는 프런트윙의 감성이 잘 녹아 있다.

문제는 두 회사 다 괴이할 정도로 ‘공대생 농도’가 높은 회사라는 사실이다. 이들을 붙여놨더니 키리키리 엔진을 마개조를 시켜놨다. 일반적인 설정 외에도 세부적인 텍스트/사운드 설정은 물론 다양한 핫키가 적용되어있고, 세부 설정으로 가면 동영상 해상도부터 TTS 설정까지 정말 다양한 기능이 들어있다.

또한 Steam판은 세이브 파일을 스팀클라우드에 저장할 수도 있다. 기존에는 볼 수 없던, ‘개발자’의 시각을 담은 기능이다. 실제로 플레이하는 데에는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세이브 직후에 게임화면으로 돌아갈 것인가/선택지가 나올 경우 마우스 커서를 강제이동할 것인가/보이스 재생시 텍스트를 숨길 것인가 등은 플레이어의 스타일에 따라 천차만별이고, 막상 없으면 애매하게 신경 쓰이는 부분인지라 거기에 대한 선택지를 제작사에서 챙겨 주는 점은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울 따름이다. 또한 태블릿 시대를 감안한 듯한 터치 액션 옵션은 노벨게임의 미래에 대한 제작자의 고뇌를 느끼게 해준다.


후회 없을 추천 게임!


굉장히 농도 짙은 스토리라 착각을 일으키긴 하지만, 결국 실제 플레이 시간은 10여 시간 내외로 짧은 편이다. 플레이를 끝내고 스토리를 곰곰이 되새겨 볼 시간을 포함해서 설계한 거라면 플레이타임이 꽤나 늘어날 수도 있겠지만, 작품 내에서의 복선은 대다수가 회수되는 편이고, 시리즈물도 아니라서 이어질 이야기나 요소가 딱히 있지도 않다. 더구나 전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집중 조명하는 공간은 조그마한 섬마을 하나인 셈이라 세계관도 그다지 넓지 않고, 등장인물도 많이 꼽아봐야 10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 농도는 짙지만 양이 한 컵밖에 되지 않는 사골국물을 마신 셈이다. 가격이 2만원대라 별 소리가 나오지 않을 뿐이지, 풀프라이스 게임이었다면 구매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들 문제다. 물론 여타 풀프라이스 게임 가운데 훨씬 심각한 볼륨부족의 게임이 차고 넘치긴 하지만, 프로젝트의 크기 치고는 많이 아쉬운 플레이타임이란 이야기다.

또한 전연령판인 탓에 에로 씬이 없어 CG분량이 상당히 적다. 차분을 제외하고 대략 10장 정도의 풀컷 씬이 존재할 뿐이고, 용량의 대부분은 보이스와 캐릭터 스탠딩 CG가 차지한다. CG의 퀄리티라도 낮으면 덜 아쉬울 텐데, 워낙에 구도와 색채미가 뛰어난 컷 씬 CG들이다보니 더 보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거기다 단편으로 마무리되는 닫힌 결말의 스토리이다 보니 후속작도 기대할 수 없어 아쉬움을 더한다.

스팀 가격으로 현재 21,530원, 사실 이정도 게임을 만나기엔 좀 미안한 마음이 드는 가격이다. 노벨계 게임을 오래 플레이하다보니 미들프라이스 6만, 풀프라이스 10만이 당연한 가격으로 느껴지는 와중에 이런 물건을 만나 감사한 마음도 든다. 압축률도 매우 높아서, 바쁜 현대인의 생활 패턴을 고려해 일부러 플레이타임을 짧게 설정한 것은 아닌가 싶어질 정도다. 주변의 에로계 플레이어들에게 주저 없이 추천하고 다닌 게임인 만큼, 노벨계에 어느 정도 적응한 사람이라면 올해 안에는 꼭 한번 플레이해보라고 추천하는 게임이다. 되도록 스포일러를 뿌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느 부분이 어떻게 미리니름이 될지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일단 지갑에도 많이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이니, 저 두 제작사의 게임을 플레이해본 경험이 있고 관심이 있다면 꼭 한번 플레이해보기를 추천한다.

 


 아트리는 이런 게임! 백문이 불여일견이겠지?

INSIDE GAME

우리와 함께 게임을 풀어갈 주인공이다.

 


게임 시작하고 10분 안에 나오는 평범한 키스씬이지만, 1시간쯤 후에 저 키스조차 복선으로 등장한다.

 


뜬금없이 ‘현관합체’가 떠올라 적잖이 당황했다. 캐릭터 디자인이 많이 닮긴 했다.

 


가장 큰 문제. 서브히로인들이 존재는 하는데 모조리 공략불가인 단일루트 방식이다. 이렇게 매력적인 캐릭터를 뽑아놓고 공략불가라니!

 


미노리 수준은 아니지만 광원이 유려한 배경 CG가 유난히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