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나가는 미소녀 시트콤, 라뮤네이션

막 나가는

미소녀 시트콤

라뮤네이션


미소녀 게임 뭐 있나, 그 까이 거 뭐 사이다 마시듯 대충 즐기는 거지! 

가볍고 경쾌하게 막 나가는 미소녀 시트콤을 소개한다.

by 사요


 

미소녀 게임, 일본에서는 좀 더 직설적으로 걸(girl) 게임이나 에로(eros) 게임이라고 한다. 

미소녀, 걸, 에로 어느 쪽을 봐도 게임의 장르 정체성이 희박하다는 느낌은 올 거다.

다른 게임 장르들, 예를 들어 FPS나 AOS 등이 나름 유니크한 게임성을 아이덴티티로 가지고 있는 것과는 구분되는 점인데, 어쨌든 30년 넘게 이어진 장르다보니 나름대로의 템플릿은 있는 편이다. 

예를 들면 주인공과 미소녀 사이의 치정극을 다룬다거나, 에로스와 드라마 가운데 어느 쪽을 중시하는가에 따라 갈린다거나, 플레이어와 주인공은 암묵적으로 동일시된다는 전제가 깔린다거나 하는 규칙은 존재한단 이야기다. 

하지만 템플릿이란 무엇인가. 

깨부수라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실제로 그랬다가 발매 당시에는 신나게 욕을 먹었지만, 이후 Steam을 통해 재평가받은 문제작, LAMUNATION!

이 바로 오늘의 미소녀 게임이다.


다사다난했던 LAMUNATION!의 행보

LAMUNATION!은 2016년 6월, 일본의 WhitePowder란 회사에서 발매한 미소녀 게임이다. 

사실 미소녀 게임에 나름 관심이 있어도 이 회사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 많을 텐데,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LAMUNATION!만 출시하고 거의 망하다시피 했으니까. 

앞에서 살짝 언급한 게임 자체의 특징도 있지만, 사실 발매 당시에도 회사 스태프들이 트위터에서 비호감 발언을 자주한 탓에 게임 외적인 욕을 먹었던 것도 한몫했다. 

모 골프 게임처럼 대놓고 플레이어를 적으로 돌린 수준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판매량이 그렇게 나쁘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후속편은커녕 회사 자체가 게임 하나 내고 사라지는 운명을 맞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까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던 LAMUNATION!이 부활한 것은, 뜬금없이 2019년 11월 Steam을 통해 영어/중국어/일본어의 3개 국어 번역이 들어간 LAMUNATION! -international-이 발매된 덕분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유행하던 일본식 미소녀 게임의 번역을 통한 글로벌 플랫폼 진출에 한발 걸친 셈인데, 발매 1년이 가까워지는 지금까지도 꾸준히 매우 긍정적 평가를 유지하고 있을 정도로 평이 좋았다. 

거기에는 할인된 가격이나 혜자스런 분량 등의 이유도 분명 있겠지만, 어쨌든 게임 자체가 분명 나름대로 내실은 갖추고 있다는 것 자체는 증명된 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덕분인진 몰라도, LAMUNATION!를 아는 사람이라면 여러 가지가 익숙한 ‘키라키라 몬스터즈’란 새로운 시리즈물도 나온다니까 하니 나름대로 해피엔딩 아닐까?

<일러스트 설명: 대충 사이다로 빔 세이버를 만들고 있다>


Extreme Happy, Non Stop Comedy

딱히 업데이트는 없지만 어쨌든 살아남아 있는 LAMUNATION!의 홈페이지에 가서, About this game이라 적힌 곳을 보면 거기에는 단 한마디만 적혀있다. 

"이 게임은 모든 길이 행복으로 이어지는, 머리를 텅 비우고 즐길 수 있는 통쾌 논스톱 코미디 어드벤처입니다.” 

다른 수많은 미소녀 게임들이라면 백 스토리나 게임의 컨셉, 세일즈 포인트나 하다못해 게임 시스템의 특징 따위를 구구절절 늘어놓았을 소개란이 이 한마디로 깔끔하게 대체된 셈이다. 

하지만 LAMUNATION!의 홈페이지 전체를 둘러보면 이 정도는 매우 건실한 설명이었음을 깨달을 거다. 

세계관 설명 페이지에는 ‘멍게: 현대의 수수께끼’라고 쓰여 있다. 

캐릭터 소개란에 가보면 ‘모두의 친구입니다’로 모든 설명이 끝나는 캐릭터가 당당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 이 캐릭터가 ‘모두의 친구’라는 단 한 줄로 소개된 그 내레이션이다.

개드립으로 점철된 홈페이지는 본편의 내용을 가리기 위한 연막일까? 

물론 그런 미소녀 게임들이 없진 않지만, LAMUNATION!은 그런 면에서 훌륭한 표리일체의 표본이라 할만하다. 

이 게임에는 마법이 존재하는 현실 세계를 기반으로 하는 자유로운 학원이란 배경이라던가, 망해가는 가업으로 고민하는 히로인들이라던가, 도시를 지배하는 기업과 그 정점에 서있는 세계 제일의 마법사 같은 심각한 요소들이 산재하지만, 사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플레이어는 쉴 새 없이 들어오는 개그와 비속어, 편의주의적인 설정과 속편한 전개, 그리고 미소녀 그림과 성우의 열연에 정신을 못 차릴 것이고, 어차피 이 게임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행복한 결말밖에 안 나오도록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니 말이다.


-게임 소개문처럼 머리를 텅 비우고 즐기는 게 포인트다.


물론, LAMUNATION!이 처음부터 끝까지 개드립밖에 없는 작품은 아니...라곤 할 수 없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이라면 그냥 개그 미소녀 게임, 이라고 소개하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이 작품이 기존 미소녀 게임들과 선을 긋고, 그래서 종종 도를 넘은 비난을 들었던 이유는, 사실 이 게임은 미소녀 게임이 아니라 일종의 콩트, 또는 시트콤처럼 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내레이션을 그 좋은 예로 들 수 있겠다. 

이 게임은 이야기 진행이나 외부 묘사는 물론 종종 캐릭터의 속마음까지 전부 이 ‘플레이어나 캐릭터도 아닌 제3의 인물’, 즉 내레이션이 담당하도록 하고 있다. 

플레이어와 캐릭터 사이에 벽을 하나 세우는 셈인데, 플레이어를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시켜서 대리만족을 먹이는 게 미소녀 게임의 기본적인 문법에는 오히려 반하는 행위니까 말이다.


그 외에도 다른 미소녀 게임이라면 절대 꿈도 못 꿀 요소들이 LAMUNATION!엔 널려있다. 

어느새 히로인들이 주인공 빼고도 서로 좀 지나치게 친해져 있다던가, 메뉴 버튼에서 원클릭으로 모든 에피소드와 일러스트를 개방할 수 있다든가, 분명히 루트가 다르고 에피소드도 다른데 일어나는 사건들이 똑같다든가 하는 요소들은 기존의 미소녀 게임에선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을,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예쁜 미소녀들과 연애하는 걸 즐기는’ 여타 미소녀 게임 기준으로 평가하면 당연히 개판 5분전이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고, 실제로도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출시와 더불어 혹평 속에 망해버렸다. 

하지만 한발 뒤로 물러서서 그냥 ‘미소녀 많이 나오는 개그 콘서트를 본다’고 생각하면 제법 빵빵 터지는 즐거운 개그물로 즐길 수 있다. 

시간은 사용자의 마음에 여유를 준 것 같다. 

그래서인지 LAMUNATION!의 Steam 평가는 지금도 매우 긍정적이다. 

그러니까 굳이 따지면, LAMUNATION!은 미소녀 게임이란 장르로 팔린 게 불운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이 게임에서 운전면허 같이 사소한 데 신경 쓰면 지는 거다. 


미소녀 게임의 저변을 넓히는 작품

LAMUNATION!의 발매 후 4년이 지났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이 개척한 구역은 미소녀 게임 시장에선 허허벌판으로 남아있다. 

시나리오를 개그풍으로 쓴 작품들이야 많지만, 그렇다고 각본 자체를 아예 코미디 상황극처럼 써버리는 경우는 지금도 극히 드무니까 말이다. 

어쩌면 이런 방향성 자체가 애초에 미소녀 게임과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을 거다. 

하지만 30년 전 미소녀 게임은 사실 그냥 포르노 그 자체였다. 

지난 30년 동안 다양한 시행착오를 거쳤기 때문에 그나마 지금 드라마성이니 게임성이니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바뀌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어쩌면 LAMUNATION!도 시대를 앞선 선구자일지 모른다. 

아쉽게도 이 사실은 미래의 미소녀 게임 유저들이 확인해줄 문제지만 말이다.